조용한 그곳에
꽃은 아름답다. 고금을 통해 모든 아름다움을 견주어 ‘꽃과 같이’라고 했듯이 꽃에 대한 찬미는 어디서고 한결 같다. 이러한 꽃은 대지를 근원으로 한 생물 가운데 결정(結晶)의 표정을 주고있다. 자태는 대기 속에서 뿌리로 시작해서 줄기로, 줄기로부터 다시 가지와 개화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이 대견스럽다.
꽃을 다병(茶炳)에 꽂는다는 것은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봄에는 긴 겨울을 이기고 나온 꽃이 있어 우리에게 자연의 섭리와 정감을 준다. 인간은 자연에 살고 자연은 인간에게 존재 이상의 가치를 제공한다. 이 자연 속에는 산과 강이 있고 이 가운데 끊임없이 피고 지는 꽃이 있다. 노목(老木)의 가지에서 풍상(風孀)을 되새기며 봉오리에서 만개한 꽃의 결정을 맛보기도 한다. 하나의 싹이 홑잎을 틔우고 줄기를 올리듯이 봉오리는 만남을 예시하기도 한다.
다화(茶花)는 꽃에 숨어 있는 여유와 공간에 대한 조형을 보여준다. 이것은 다병이 발전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에게는 다병이 인연과 이별을 전해 주는 동시에 지난날과 다가올 미래를 음미하게 한다. 그리하여 무한한 공간과 여유를 주는 시간으로 찬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1985년 11월, 동경에 있는 초월화랑에서 ‘공간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전시를 했다. 이 전시회는 공간을 주제로 한 전시였다. 2층에는 데시가하라 쇼후(초월대학 1대 가원(家元))의 목조각과 이싸무노 꾸지의 데라코타, 그리고 데시가하라 히로시(초월대학 3대 가원)의 도예가 전시되었다. 이들은 현대미술에서 전위작품을 추구하고 있으며 다병을 중요시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개성적인 작업을 전개하는 작가들이다.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각기 개성적인 작품들이 통일감 있는 배치로 서로 연결을 짓고 있다. 더구나 이 다병들은 도전정신을 드러내는 정열이 보였다. 평면에서 공간으로, 환상에서 공간으로 서로 반응하면서 공간을 채우고 있다.
초월화랑은 1950말부터 1960년에 걸쳐서, 전위예술의 본거지로 폭넓은 전시를 시도한 전시장이다. 이들의 직관련긍ㄴ 자연을 보는데도 세련된 감각이 있다. 그리고 다화를 상징화하고 형식화하는 지혜를 보인다. 그런 점이 장점이지만 우리가 의식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는 공간은 평면체가 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예술이라는 것은 끊임없는 발전적인 자세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이싸무 노꾸지는 계단모양으로 돌을 조각한 공간에 작품을 설치했다. 이들의 작품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전시이다. 나무를 깍아내어 깔아 놓은 형태, 거기에 붙여진 색종이에 공간적 효과가 마치 낙엽이 전시장으로 날아온 것 같은 분위기이다. 계단에 걸쳐있는 이싸무 노꾸지의 작품도 환경을 추구하는 조각이다. 바깥쪽에서 보나 안쪽에서 보나 어디서 보든 앞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 오두막인데, 그 안에서 밖으로 나와 뻗는 한 대의 나무가 동판으로 씌워져있다. 이 가지 끝이 다시 바깥으로 나온다. 오두막 위에는 파란 침낭이 가로누워 있다. 이것은 인간과 환경이 연속적인 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작품은 공간으로 향하는 입체작품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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