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호] 2011년 10월 21일 금요일 발행
살곶이다리(전곶교 箭串橋)
중랑천이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접어들기 직전 사근동과 성수동을 잇고 있는 성동교 바로 위쪽에 조그마한 돌다리가 눈에 띈다.
한양대학교 바로 옆에 놓여진 이 다리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1967년 12월 15일에 사적 제 160호로 지정되었으며 국유이다. 옛날 수표교, 금천교와 더불어 서울에서 손꼽히는 3개 교량 중 하나이다.
이 다리의 공식적인 이름은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에 의해 ‘제반교(濟磐橋)’라 이름 지었으나, 조선시대에 이 다리를 중심으로 그 일대를 살곶이벌로 불러 일명 ‘살곶이다리’라고도 하며 한자 표기는 ‘전곶교’라 하였다.
이 다리가 착공된 것은 세종2년(1420) 5월이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한 후 역술가의 말을 따라 이궁(離宮)에서의 생활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개성의 이궁은 한성과 거리가 먼 관계로 도성에서 가까운 동교, 즉 현재 광진구 자양동의 대산(臺山)에 세종 즉위년 10월부터 새로운 이궁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궁의 축조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됨으로 인하여 태종은 우선 세종 원년 2월에 궁터 옆 높은 곳에 낙천정(樂天亭)이란 정자를 완공하고 자주 나아가 있었다. 또한 태종의 형인 정종도 광나루 옆 산허리에 광진원(廣津院)이란 전각을 짓고 머물러 있어 당시의 왕인 세종도 자연히 이궁 행차가 잦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세종2년(1420) 5월 6일에 교량공사가 착공되었으나, 장마철이 겹치는 등 5월 25일 기초공사만 끝내고 공사를 중지하였다. 이후 성종 14년(1420)에 이르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1만개의 돌을 날라 300여보에 달하는 긴 다리를 놓는데 성공하였다.
허나 대원군이 집정했던 고종 초년에 이 다리 폭은 겨우 3척 남짓으로 줄어 버렸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고 또 서양 함대가 한강을 거슬러 오지 못하게 강바닥에다가 석성을 쌓는 작업을 병행하면서 전국의 석재를 징발하였기 때문이다.
이 전곶평은 지역이 넓고 평탄하여 일망무제(一望無際)한 가운데 목장(牧場)이 있고 또 녹양(錄楊)과 채전(菜田)등이 곁들여 봄철이면 심춘객(尋春客)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으며, 또 강변을 따라 물새들이 한가롭게 날아드는 풍경도 사계절 모두 볼만하다.
<천년 후, 다시 다리를 건너다> 글 | 손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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