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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경영신문/172호

동명 엔지니어링 탄생과 CEO 16

 

정주영의 불호령 그러나 결별
 
 정주영의 청천벽력 같은 호통에 신동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로한 상태에서도 앞으로의 사업을 걱정해주고, 혹여나 잘 안되면 다시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인간적으로 고마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1970년 2월 13일 신동수 사장은 국전을 인수하고 6월 27일에는 사명을 오늘날의 동명기술공단으로 바꾸었다. 그의 나이 세상사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불혹의 40세가 되던 해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새내기 사업가 신동수에게 세상은 쉽게 성공의 열쇠를 쥐어주지 않았다.
 지하철 1호선 실시설계, 성남시 도시계획 등을 수행하며 일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했으나 경쟁이 심해 사업수주가 예상보다 너무 힘들었다. 지금까지 기술인으로 설계만 하다 보니 경영 경험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자금사정도 갈수록 악화됐다. 신현주로부터 인수할 당시 사업자금을 변통해 준다고 해서 큰 걱정 없이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자금압박이 너무나 버거웠다.
 결국 회사경영 3년 만에 신동수 사장은 큰 실의에 빠졌으며, 얼마 후 회사운영 일체를 신현주에게 다시 넘기고 잠시 동명을 떠났다. 사실 그동안 회사운영을 하면서 진 빚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외 건설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시공업체들의 해외 진출이 러시를 이루고 있었다. 해외 진출의 대표적인 회사는 고려개발이었다. 고려개발은 1970년대 해외사업 수주액이 가장 많은 건설사로 기록되기도 했다. 네팔,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 숱한 비행장을 만들고 다리를 놓았다.
 1947년경 신동수가 고려개발을 찾아갔을 때 정천석 회장이 반색을 했다. 당시 고려개발은 해외사업이 활성화되면서 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었는데, 현대건설에서 닦은 신동수의 화려한 경력은 정천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고려개발과 인연을 맺은 신동수는 곧장 말레이시아 현장으로 날아갔다. 말레이시아행에는 신동수가 팀을 구성할 권한도 주어졌는데, 이때 그가 조직한 10여 명의 팀 구성원 중에는 김영홍과 유승옥(홍익 회장)도 있었다. 김영홍은 토목과 후배로 LG건설 부사장을 지낸 바 있다.
 신동수가 나간 현장은 말레이시아 시바(SIBA) 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항만공사와 동서고속도로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는데, 신동수는 이 중 동서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루이교, 코스웨이교, 리서버교 등 3개 교량을 건설하는 현장소장을 맡았다. 정글 속에 건설되는 교량의 연장은 총 2.5km나 됐으며, 공산 게릴라가 준동하는 위험지역이었다. 그래서 현대건설, 동아건설 등이 입찰에 참여했다가 난공사에다 채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한 사업이었다. 그만큼 위험지역이어서 현장에는 늘 군부대가 주둔하여 경비를 맡고 있었다.
 교량의 교각 기초심도가 30m에다 교각높이도 100m나 되는 거대한 규모와 정글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건설과정에서 설계변경 등 어려움이 많았다. 더욱이 밀림의 무더위와 풍토병, 낯선 이국에서 감내해야 하는 향수병으로 고통의 강도는 몇 곱절이나 됐다.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2년여 만에 대부분의 공사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