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 유병언 서울시가 키웠다
한강에 한국의 호랑이 모형 등장
세모 깃발 날리게 한 원인자는 서울시
세월호 침몰의 파장이 국가 전체를 흔들면서 도무지 진정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 세월호의 원초적 해운사업의 단초는 멀리도 아니고 대한민국 서울의 한강 유람선으로 시작된다.
한강은 ‘한강을 다시 살려야 한다.’라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지시로 1982년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시작된다.
그리고 85년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은 한강개발을 마무리하고 <한강사>를 편찬하면서 서문에-한강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시민들의 정열로 되어야 하며 한강을 보존코자하는 의지가 우리 시민들의 의무로 되어야 하며 그 정열과 의무에서 보람을 찾기 위해선 담당자들의 엄밀하고도 성의 있는 노력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라고 적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강은 죽은 한강에서 살아있는 한강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 청정수변에 유람선이 다닐 수 있는 뱃길이 트여 강변에는 유람선을 이용하는 승객이 타고 내릴 수 있는 11개소의 선착장 시설이 마련된다.
그 선착장의 위치는 옛날의 정취를 감지할 수 있도록 옛 나루터에 터를 잡고 그 주변에는 역사적 사적지들이 발굴 복원된다는 것이 당시의 사업계획이다.
유람선은 20~50톤급과 500~1천 톤의 바지선이 운항되어 승객운송과 더불어 화물운반으로도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그 유람선 주인공으로 당시의 세모사장이며 현 세월호의 중심인물인 유병언씨가 있다.
서울시는 한강에 유람선을 띄운다는 사업계획아래 한강유람선운항업체 선정을 하게 된다.
서울시는 85년 3월 언론에 사업공고를 내고 4월에는 10일 동안 참여기업들을 받게 된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기업으로는 선박제조 및 수리사업 전문회사로 10여년 이상의 정통을 지닌 코리아 타코사(총자산규모 831억1천만 원),선박제조전문회사인 대선조선(자산규모 202억 원),라이프주택(3450억 원),글로리 레저(73억 원),전진실업(6400만원)선문그룹(신설기업),세모(25억 9천만 원)원광(35억 5천만 원)등이 참여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당초 1개사만을 선정한다는 사업방향을 2개사로 변경하고, 사업자 선정 원칙을 총자산규모가 1백억 원 이상이거나 10억 원 이하의 기업은 제외한다는 기상천외하고 애매모호한 심사기준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심의에 붙였지만 결과적으로 원광이 1위, 세모는 2위로 심사배점이 확정되자 서울시는 당초 1개사에서 2개사로 최종 선정하게 된다.
그 당시 한강을 책임지는 부서는 상하수국으로 이후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을 지낸바 있는 이기창씨가 실무책임을 맡았고 장인식 치수과장이 실무를 담당했었다.
이후 91년경 대전지검은 오대양 수사사건을 발표하면서 한강유람선에 대하여 세모의 한강유람선 운항허가 취득은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의 특별지시에 의한 특혜선정이었다고 발표한다.
당시 수사를 펼친 검찰은 염보현씨에 대한 수사도 병행 했으나 수사당시 염 시장이 미국에 채류하고 있어 직접조사를 못하고 지시배경이나 위법행위는 밝혀내지 못하고 만다.
한강유람선 사업전략을 세우게 한 당초 기획자는 사실 코리아 타코사였지만 결과는 세모로 사업권이 확정되는 그 뒷 배경에는 전두환 전대통령과 전경환 그리고 염보현과 유병언으로 이어지는 미심쩍은 관계가 아직도 의혹으로만 남고 있다.
하지만 전경환과의 관계도 IMF위기가 닥쳐오던 97년 새마을조직에 5백억 원가량의 자금을 지원하라는 전경환씨의 부탁을 수차례 시간을 끌며 거절하다가 결국 당시 거래은행이던 00은행 및 모든 사업자금이 동결되면서 세모는 부도가 난다.
하지만 세모의 전신은 사실 스쿠아알렌 등 무역을 통한 건강식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던 삼우트레이딩(주)(경기도 부천시 도당동소재)에서부터 출발한다.
83년 2월에는 대전경찰서가 대전시 소재의 문부남(당시 40세)씨 집에 기거하던 기독교복음침례회중앙회 이복칠목사(당시43세), 이무상전도사(당시 60세)가 신도들에게 회사를 중상모략하고 유인물을 돌려 회사가 문을 닫게 했다고 한 시간 동안 감금하고 협박하여 당시 42세인 사장 유병언과 영업주임에 김원영, 종업원 김경도 등 5명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협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이후 삼우트레이딩은 세모 스쿠아알렌으로 사업을 확산하고 92년경부터는 수입정수기를 취급하기도 했다.
당시 정수기를 세모에 납품하던 수입업체 김모사장은 자금결재는 매우 정확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삼우트레이딩 (중구 삼각동소재/대표 유병언 41세)이 기반을 다지던 81년경에는 뺑소니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청소부의 유가족을 돕기 위한 성금 1백만 원을 서울시에 기탁 당시 메스컴에 화재를 던져주기도 했다.
유병언씨는 이외에도 우체부를 돕는 성금 등 세간의 화재를 불러오며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의 모양새로 여론의 신뢰를 쌓으면서 또 다른 내면을 숨기는 2중적 행태를 지속해왔다.
삼우트레이딩은 76년 (유병언의 나이 36세) 대구에서 부친의 친구가 하던 삼우무역을 인수하면서 출발한다.
78년에는 7명의 이사와 1명의 감사로 자본금 1억 5천만 원으로 삼우트레이딩(주)를 설립한다.
당시 이사진은 구원파 선교부장, 총회장, 외과원장, 광주 구원파 교수 등 대체적으로 구원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들의 연고지도 대구, 대전, 서울, 부산, 광주, 제천 등 지역분포가 넓어 사채 등 자금확보를 위한 포석이었다는 의혹도 있다.
삼우는 김포시 사우리에 본사를 두고 섬유류 제조, 도료 연료제조, 합성수지 가공 판매, 전자부품제조 판매, 봉제완구 제조판매 등을 했는데 봉제완구분야에서는 박순자씨가 운영하던 오대양과 연계된다.
78년경에는 휴대용비누와 튜브비누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고 자본금을 2억 2천만 원으로 늘린다. 79년부터는 수출입업무를 추가하고 81년경에는 장식공예품 제조업을 추가등록하고 88년까지 15차례의 증자를 통해 총 자본금 37억 원의 회사로 성장하는데 그 과정 중 85년경 한강유람선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삼우는 89년 2월 한강유람선의 세모에 합병되고 97년 6월경 최종 부도난다.
IMF위기가 닥쳤던 97년에는 한보건설(1월),삼미건설(3월),진로그룹(4월)등이 최종 부도가 나고 5월에는 대농그룹 부도유예, 한신공영(6월),기아그룹(7월),진로 등 6개사 법정관리(9월) 쌍방울(10월),태일정밀(10월),해태그룹(11월),뉴코아(11월)부도 등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며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11월 22일 IMF에 공식 구제요청을 신청하게 된다.
그리고 12월에는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부도나고 대우자동차와 쌍용자동차가 합병된다.
세모 유람선에 앉은 호랑이
다시 한강유람선 선정 시절로 돌아가자.
유람선 운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애초에는 없는 심사규정 중 10억 원 이하와 100억 원 이상의 기업이 배제된 체 유람선 모형과 조형미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세모는 유람선 위에 한국의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 모형을 얹히자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제시했다.
서울시는 이 같은 상징물을 좋은 점수로 평가하여 세모유람선의 조형을 공표한다.
그러나 당시 공보관실에서 실무를 맡았던 김모씨는 이에 대해 - 한강유람선에 호랑이 모형은 서울시 공무원과 언론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당시 유병언 사장은 호랑이 상징물에 대해 적극적인 해설을 했다. 작은 키에 유창한 언변과 상대방을 직시하는 눈빛이며 상대를 직관하는 모습은 역시 조그만 왕국의 왕자와도 같았다. 그러나 서울시 발표가 있은 후 언론과 시민들에게서 비판이 쏟아졌다.
한강에 백조나 기러기, 황새 등이 있다면 몰라도 산에서 사는 호랑이가 어떻게 조형미를 갖출 수 있냐는 비아냥이었다.
서울시 출입기자들에게서도 좋은 호평을 받았던 호랑이 모형은 언론으로부터 정반대의 호된 질책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서울을 중심으로 한 괴편지들과 민원이 쏟아졌다.
아마도 유병언씨의 관련기업과 관련 종교단체 등에서 의도적으로 보낸 문서라고 생각한다. 호랑이 모형이 왜 나쁘냐는 질타성 반론들이었다. 그 결과 당시 이기창 국장은 염시장에게 호된 질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라고 회상한다.
역대 서울시장을 지낸 모씨는 어느 회고문에서 -서울시 기술자들은 자존심이 없다. 공사비가 1백억 원이 든다고 주장하고서 값을 깎으라고 지시하면 결과적으로 반값도 안 되게 시공할 수 있단 말이야. 도깨비 방망이 같아. 얼마나 재미있어. 안 되는 것은 죽어도 안 되어야지 말이야-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의 아픔이 온 국토를 토악질시키는 과정에서 그 전신인 세모가 한강을 유람하게 한 근본원인은 누구의 지시인지는 명확치 않아도 결과적으로 심사기준이나 심사방식의 전환 등으로 결국 세모를 한강에 안착시킨 서울시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서정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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