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영의 수도국 시절 (못 다한 이야기 1-3)
태영을 키워낸 선유 정수장 공사
■태영건설과 선유수원지
수의계약으로 하게 된 동기는 공사가 시작되자 78년 1년 만에 선유수원지 20만 톤/일을 준공하고, 공사 중 다시 20만 톤/일 규모로 설계 변경하게 된다.(이유) 계속 수의계약하고 공사역시 계속하여 다시 6개월 후에 20만 톤/일 수원지를 완성함으로서, 사상 최대의 빠른 속도로 40만 톤/일 정수장공사를 성공적으로 시공 완료하게 된다. 아주 조그마한 회사였던 태영으로서는 해내지 못할 공사를 조기 완공함으로써 대단위 공사의 성공과 함께 상하수도 분야에 막강한 실력을 갖는 회사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태영은 회사규모에 비해 너무 큰 공사를 함으로서, 자금 회전이 어려워 매 2주마다??2억 원의 기성을 서울시가 지불하였으며, 120억 원(총공사비)중 도급액 38억 원의 공사를 순식간에 해치움으로써 건설회사로서는 상당한 이익을 보게 되었다.
당시 현장인력이 부족하여, 본인인 담당계장이 직접 측량기를 보고, 감독이 Pole대를 잡아 Final Level을 정해주는 정도였으며, 매일 불란서 Supervisor들과의 회의부터 시작하여, 현장 진두지휘를 서울시 담당계장이 직접 하기도 하였다. 일일 최대인원이 500명이 투입되고 매일 수백 톤의 콘크리트를 쳐야 했던 당시로는 대규모 공사였다. 당시 소위 돌관공사로 불란서 DE VILLARE라는 책임자가 너무 위험하게 빨리 공사를?한다고 공사를 중단하라고 소리칠 때, 나는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I make decision, You just advise me! 하고는 현장 소장에게 "그대로 진행하라!"하고 지시했던 일이 생각난다.
실제로 그때 동바리를 세우면서 콘크리트를 치는 바람에, 구조물이 건들건들한 상태에서도 한편으로 철근배근하고 한편에서는 콘크리트를 치던 생각이 난다. 나는 그때 거의 매일 밤 "선유! 선유!"하고 잠꼬대를 했다고, 우리 집사람은 회고 하고 있다. 그때 팔당 수원지(현, 하남정수장)는 100만 톤/일의 국내 최대 규모의 정수장 건설공사였고, 선유수원지 보다 2.5배나 더 큰 용량의 건설공사로 선유수원지와 동시에 극동건설에서 우수한 인력들이 건설에 참여했지만, 지금도 극동건설이 팔당 수원지에서 돈을 벌었다거나, 혹은 극동건설이 수처리공사의 전문성을 가진 특별한 실력을 가졌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없다.
(왼쪽부터)태영유영옥대리, 최세영(수도국토목기좌), 김덕환 태영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