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에 첫걸음을 내딛으며
1.1. 모든 일에 국가와 국민이 먼저다
▲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저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 목민관牧民官, 즉 수령首領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힌 바 있다. 선생이 남기신 탁월한 지침들은 오랜 시간이 흐른 현재에도 여전히 공직자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국정에 임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금과옥조金科玉條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의 필자에게 누군가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하고 물으면 “대통령이요”, “과학자요” 하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의 아이들은 우리 세대의 성장기 때 의식보다는 현실적이어서 그런지 연예인이라는 대답이 많아졌다고 한다. 필자의 세대가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반면, 요즘 아이들은 TV나 인터넷과 같은 매체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결과가 아닌가 싶다. 여하튼 필자는 경찰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고등학생 시절 즈음에 대학에 진학하면 행정고시를 해서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기왕에 사나이로 태어났으니 민간 기업체에 취직해서 샐러리맨이 되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서 공직자로 사는 것이 부모님의 기대에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행정고시를 보려면 당연히 행정학과에 입학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별 다른 고민 없이 행정학과에 지원했다.
공직에 관하여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대학시절에 가끔 같은 과의 친구들과 “왜 고시를 봐야 하는가?”하는 주제로 토의하곤 했는데, 생각 외로 많은 친구들이 공무원으로 사는 인생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정부가 국민을 위해 제대로 봉사하도록 바꾸기 위해서인데, 정부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속에서 공무원 한 사람이 과연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 나 한 사람 어떻게 한다고 정부가 바뀌겠는가?”라는 식의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필자는 생각이 좀 달랐는데, 아마도 친구들에 비해 필자가 순진했거나 아니면 공직에 대한 열의가 더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필자는 “위인이 나타남으로써 어느 한 순간 세상이 바뀌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많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꾸준히 노력하고 기여한 결과가 모여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비록 당장은 나 한 사람이 어떻게 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모이면 결국 세상도 변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공직을 담당해야 한다면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싶다.”라고 발언했었다. 여러 친구들이 공무원이 되어 포부를 펼쳐보라며 필자를 격려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필자의 신념은 이러하다.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나는 왜 공무원이 되려 하는가?”를 자문하고, 다음으로 그에 대한 답을 명백히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공무원도 민간기업 등의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봉급을 받으며 생활하는 직업인이지만 일반회사의 직장인들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아 국민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수행하기 때문에 반드시 공무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국민들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또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공무원이 공권력을 통해 국민의 삶 전반에 직·간접으로 미치는 영향에 비교하면 그 성격부터가 전혀 다른 것이다. 공무원은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봉급을 받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다. 국가가 규범적으로 공무원에게 막대한 권한을 위임해놓고 있으므로 위임받은 권한을 공직자가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 국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뚜렷한 국가관과 공직관이 있어야 한다. 설혹 공무원이 되기 전에는 그런 의식이 없었더라도 공무원이 된 입장에서는 공직자로서의 사명감을 충전해야 한다. 공무원이 공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국민의 원망은 해당 공무원뿐만 아니라 정부 전체를 향하게 된다. 국민들의 눈으로 보면 공무원이 곧 정부이기 때문이다.
혹여 공무원이 되고자 한 저간의 동기가 국가의 발전과 국민행복에 기여함에 있지 않고, 그저 신분이 보장되는 직장이어서 또는 주어진 권한으로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직업이어서 한 선택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사직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현명한 처신이다. 많은 돈을 욕망한다면 영리를 좇는 사업에 투신하든가 푸짐한 인센티브가 따르는 직장을 알아보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다. 현재의 공무원 봉급체제 하에서 공직생활을 통해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함을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물론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 넉넉한 생활을 누리는 경우는 별개이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공직을 수행할 경우 오히려 주변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수도 있겠다.
공직을 축재의 수단으로 생각했다가는 패가망신은 물론 국가까지 위태롭게 할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신분보장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공직을 선택했다면 그 또한 후회할 일을 만든 셈이다. 정년까지 무탈하게 보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무능하다고 찍히면 승진이 쉽지 않게 되고, 따라서 정년이 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동료나 후배들을 볼 면목이 없어져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자주 들 것이다. 능력을 평가 받아 때맞춰 승진하는 일은 공직자들의 꿈이지만 고위직의 경우엔 어느 부처나 정년을 몇 년 앞두고 명예퇴직 하라고 등을 떠밀려 나오게 되는 사례가 흔하다. 박봉의 여건에 권한은 큰 구조인 공직은 유혹에 시달리기 쉽고, 그러다 보면 정년은 고사하고 큰 집(?) 신세를 지기 십상이다. 아마도 사법부의 신세를 지는 비율은 공직자가 일반 직장인에 비해 훨씬 높지 않을까 싶다. 신분이 보장되는 이면에는 그만큼 신분을 흔드는 요소들도 많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따라서 보장된 신분이 공직을 선택하는 이유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공무원은 정책의 결정과 집행과정을 통해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은 합리성, 합목적성, 효율성 등등 많은 지표에 의해 분석되고 설명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지표는 위국爲國과 위민爲民이다. 국가에 이롭지 않고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은 다른 모든 지표상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할지라도 바람직한 정책이 될 수 없고, 선택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깊은 분별의 마음가짐과 칼날 같은 신념이 없다면 오랜 공직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즈음에는 결국 ‘내 인생은 허망했구나!’하는 후회만 남을 것이다. 모름지기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분들은 일찍이 다산 선생께서 제시하셨던 목민관牧民官의 정신을 자신의 내면에 서슬 푸르게 벼려 놓아야만 한다.
1.2. 부하 직원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자
▲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보면 공자孔子의 말씀 중에 “아비생이지지자요 호고민이구지자야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는 말이 있다. 호학好學의 성현 공자 자신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것이 아니며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찾아 배워서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또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는 말도 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그 중에 나의 스승이 있다는 뜻이다. 음미해보면, 하찮은 것으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며, 또 좋은 것은 따르고 나쁜 것은 고치면 되니 좋은 것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쁜 것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누군가로부터 또는 그 무엇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또 배우게 된다. 인생이란 누군가를 또는 그 무엇을 만나서 엮어지는 드라마라고 하지 않는가.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화와 행태, 일하는 방법 등에 관하여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한다. 공직생활도 마찬가지다. 특히 7급 또는 5급 등의 중간직급으로 채용되는 경우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표출되곤 한다. 일반적으로 채용 후의 교육과정을 통해 통상적인 업무처리방법 등을 배우지만, 공직이란 매우 다양한 기능들을 다루기 때문에 각자가 담당해야 할 모든 업무를 교육과정 속에서 모두 다 배울 수는 없다. 또한, 임용된 후에 일할 부처와 부서가 결정되기 때문에 자기가 담당할 업무를 미리 찾아서 배울 수도 없다. 부처와 부서 배치가 끝나고 담당할 업무가 결정된 후에야 배워야 할 것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행정고시나 기술고시 등을 거쳐 첫 공직을 중간관리자로 시작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맡은 업무 외에도 문서처리나 예산·회계업무에서부터 법령 제·개정, 인사제도 등 조직 전반에 걸쳐 배워야 할 크고 작은 일들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상사나 동급자로부터 배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결국 부하직원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배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체면을 몹시 중시하는 우리의 정서와 문화가 작용하여 그런 형태의 배움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공직생활의 처음엔 예산은 어떻게 편성하는지, 예산서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자기 일과 관련된 법령이 어떤 것이며, 무엇이 중요한지 등등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 일 수밖에 없다. 사소한 예로, 필자가 첫 출근을 한 무렵에는 복사기를 다룰 줄도 몰랐고 컴퓨터를 다룰 줄도 몰랐다. 그런 일들은 기능직 여직원들이 가장 능숙했으므로 필자는 그분들께 배울 수밖에 없었다.
조직문화도 배워야 하고, 동료들에 대해서도 공부해야 한다. 일하는 시스템도 알아야 한다. 민원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서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배워야 한다. 알아둬야 할 것은 빼놓지 말고 다 배워야 한다. 모르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다.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고 1~2년이 지났는데도 남들은 다 아는 것을 자기만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창피한 차원을 넘어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소위 무능력자의 반열에 들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작은 일,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이라고 해서 적당히 넘기고 지나갔다가는 나중에 배우고 싶어도 배우기 어렵고, 정말 창피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필자는 현직에 있을 때 고시출신 후배공무원들이 새로이 배치 받아 들어오면 빼놓지 않고 꼭 이렇게 충고해주곤 했다.
“고시해서 5급 공무원이 되었다고 너무 뽐내지 마라. 고시합격증은 자격증이 아니다. 입사시험에 합격한 것에 불과하다. 여러분이 성공하느냐 못 하느냐는 이제부터 스스로 하기에 달려있다. 여러분의 성패 여부는 앞으로 2~3년 이내에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 즉 얼마나 열심히 배우느냐에 달려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조직생활과 업무에 대해 남들보다 뛰어나려면 주무관(6급 이하 직원에 대한 호칭)들한테 배워라. 주무관들로부터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 노하우를 철저히 배워라. 부하직원들한테 배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지금이라면 모른다고 솔직히 털어놓고 물어보면 신이 나서 가르쳐줄 것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서 배우려 들면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물론 언제라도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는 물어서 배우는 것이 더 낫겠지만....
<글/ 문정호 전환경부차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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