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FOCUS
성장과 도약의 동반자 신재호 회장
동명과 인연을 맺은 건 당숙이었던 신경식의 소개로 1963년 3월 국전기술공사에 입사하면서부터다. 신경식은 신현주가 내무부 건설국장 시절 과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됐으며, 당숙의 소개로 국전에 입사하게 된 신재호 회장은 처음으로 건설엔지니어링과 인연을 맺으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동명에서 신동수회장과 가장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신재호(申宰浩) 회장은 1939년 8월 10일 충북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에서 아버지 신준식(申俊植) 옹과 어머니 심경섭(沈敬燮) 여사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동수 회장처럼 맏이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가난한 산골마을에서 일가의 대들보 노릇을 하느라 어려서부터 고생이 많았다. 신동수 회장과 같은 고령 신씨이다.
동명과 인연을 맺은 건 당숙이었던 신경식의 소개로 1963년 3월 국전기술공사에 입사하면서부터다. 신경식은 신현주가 내무부 건설국장 시절 과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됐으며, 당숙의 소개로 국전에 입사하게 된 신재호 회장은 처음으로 건설엔지니어링과 인연을 맺으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특히 신재호 회장은 도시계획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경험도 많이 쌓았다. 이 분야의 첫 경험은 1963년 중반 ‘마산시 도시계획’ 사업이었다. 이 일로 3개월 동안 마산에 머물게 됐는데, 당시 마산시장이 그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이제 겨우 스물 다섯의 사회 초년병인 그에게 주민설명회를 위한 공청회에서 브리핑을 부탁했다. 자신을 믿고 막중한 업무를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도시계획 분야 지식이 풍부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그때부터 열심히 준비해서 마침내 시장을 비롯해 200여 명의 인사가 모인 자리에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시작 전에 너무 떨려 우황청심환까지 먹었으나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는 사이 공청회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 일로 그는 회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대전-황간간 고속도로, 옥천-사부리간 고속도로, 증약-추풍령간 고속도로 등 당시 경부고속도로 사업에서 크게 활약했다.
1969년에는 잠시 동명을 떠나 한국도시건설기술공사에서 근무했다. 30만 평 규모의 광명 소사지역 측량, 인천 염전지구 사업 등 많은 설계분야에서 업적을 쌓았으나, 입사 2년 만에 회사의 부도로 퇴직했다. 이후 개인 사업을 하며 고양, 파주, 원당, 일산, 벽제 등 경기북부 대부분 지역의 도시계획 관련 설계사업을 석권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동명과 다시 인연을 맺은 건 1975년이었다. 당시 경영자의 부재로 동명이 창업 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함에 따라 신동수 회장에게 경영원 확보를 논의했고, 그 후 신동수 회장은 대표이사로 다시 복귀하고 1976년부터 동명 50년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그러나 동명의 재건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청체제를 청산하고 직영체제로 전환하면서 설계인력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신동수 사장이 손수 설계하고 신재호 부사장이 직접 측량하는 등 동명의 수뇌부가 전국의 현장을 돌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파주시 수문교의 경우에는 사장과 부사장 달랑 두 사람만 현장에 나갔다. 자동차도 없이 사장과 부사장이 무거운 측량장비를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나갔다.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두 사람은 일요일에 몰래 현장에 가서 측량을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극락교의 경우는 기한이 너무 촉박해 두 사람이 측량장비를 기차에 싣고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가 겨우 약속 시한에 맞춰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두 사람 다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퇴근길의 애환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 의정부행 시외버스가 종로5가에 있었다. 을지로3가 사무실을 나와 그곳까지 걸어갔다. 가보면 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럴 때면 두 사람은 줄이 줄어들길 기다리는 대신 인근 포장마차로 들어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하루의 회포를 풀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절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고 정을 나누면서 경영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으며, 이후 동명을 최고의 엔지니어링 회사로 성장시켰다. 신재호 회장은 사업의 성공비결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신세를 입은 사람,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 앞으로 신세를 지게 될 사람, 이들 세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인생의 성공비결이라고 말한다. 사람에 대한 중요성은 인력양성으로 확대된다.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같은 제조업이 아니고 오로지 기술자들의 능력이 요구되는 업종인 만큼 인력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력관리에 있어 신재호 회장은 종종 축구경기를 예로 든다. 축구란 공격수 혼자만 하는 경기가 아니고 11명이 모두 화합과 협력으로 한 골, 한 골을 만들어가는 경기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포지션에서 최선을 다할 때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듯이 동명 역시 기술자의 역량이 화합과 협력으로 승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책임경영이다. 새가 날개 하나로는 날지 못하듯이 모든 직원들에게 직책과 권한을 동시에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념으로 신재호 회장은 1980년대 부사장직을 성실히 수행하며 동명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1990년대는 사장직을 수행하며 국내 최고의 설계회사로 도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동명과 인연을 맺은 건 당숙이었던 신경식의 소개로 1963년 3월 국전기술공사에 입사하면서부터다. 신경식은 신현주가 내무부 건설국장 시절 과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는 지속됐으며, 당숙의 소개로 국전에 입사하게 된 신재호 회장은 처음으로 건설엔지니어링과 인연을 맺으면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특히 신재호 회장은 도시계획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경험도 많이 쌓았다. 이 분야의 첫 경험은 1963년 중반 ‘마산시 도시계획’ 사업이었다. 이 일로 3개월 동안 마산에 머물게 됐는데, 당시 마산시장이 그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이제 겨우 스물 다섯의 사회 초년병인 그에게 주민설명회를 위한 공청회에서 브리핑을 부탁했다. 자신을 믿고 막중한 업무를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도시계획 분야 지식이 풍부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그는 그때부터 열심히 준비해서 마침내 시장을 비롯해 200여 명의 인사가 모인 자리에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시작 전에 너무 떨려 우황청심환까지 먹었으나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는 사이 공청회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 일로 그는 회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대전-황간간 고속도로, 옥천-사부리간 고속도로, 증약-추풍령간 고속도로 등 당시 경부고속도로 사업에서 크게 활약했다.
1969년에는 잠시 동명을 떠나 한국도시건설기술공사에서 근무했다. 30만 평 규모의 광명 소사지역 측량, 인천 염전지구 사업 등 많은 설계분야에서 업적을 쌓았으나, 입사 2년 만에 회사의 부도로 퇴직했다. 이후 개인 사업을 하며 고양, 파주, 원당, 일산, 벽제 등 경기북부 대부분 지역의 도시계획 관련 설계사업을 석권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동명과 다시 인연을 맺은 건 1975년이었다. 당시 경영자의 부재로 동명이 창업 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함에 따라 신동수 회장에게 경영원 확보를 논의했고, 그 후 신동수 회장은 대표이사로 다시 복귀하고 1976년부터 동명 50년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그러나 동명의 재건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청체제를 청산하고 직영체제로 전환하면서 설계인력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신동수 사장이 손수 설계하고 신재호 부사장이 직접 측량하는 등 동명의 수뇌부가 전국의 현장을 돌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파주시 수문교의 경우에는 사장과 부사장 달랑 두 사람만 현장에 나갔다. 자동차도 없이 사장과 부사장이 무거운 측량장비를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나갔다.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두 사람은 일요일에 몰래 현장에 가서 측량을 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극락교의 경우는 기한이 너무 촉박해 두 사람이 측량장비를 기차에 싣고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가 겨우 약속 시한에 맞춰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두 사람 다 입술이 부르터 있었다.
퇴근길의 애환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절 의정부행 시외버스가 종로5가에 있었다. 을지로3가 사무실을 나와 그곳까지 걸어갔다. 가보면 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럴 때면 두 사람은 줄이 줄어들길 기다리는 대신 인근 포장마차로 들어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하루의 회포를 풀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절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하고 정을 나누면서 경영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으며, 이후 동명을 최고의 엔지니어링 회사로 성장시켰다. 신재호 회장은 사업의 성공비결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신세를 입은 사람,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 앞으로 신세를 지게 될 사람, 이들 세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인생의 성공비결이라고 말한다. 사람에 대한 중요성은 인력양성으로 확대된다.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같은 제조업이 아니고 오로지 기술자들의 능력이 요구되는 업종인 만큼 인력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력관리에 있어 신재호 회장은 종종 축구경기를 예로 든다. 축구란 공격수 혼자만 하는 경기가 아니고 11명이 모두 화합과 협력으로 한 골, 한 골을 만들어가는 경기이다. 개개인이 자신의 포지션에서 최선을 다할 때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듯이 동명 역시 기술자의 역량이 화합과 협력으로 승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책임경영이다. 새가 날개 하나로는 날지 못하듯이 모든 직원들에게 직책과 권한을 동시에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념으로 신재호 회장은 1980년대 부사장직을 성실히 수행하며 동명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1990년대는 사장직을 수행하며 국내 최고의 설계회사로 도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동명 50주년을 맞이하여
동명 창립 50주년을 맞고 보니 실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처음 채 10여 명도 안 되는 국전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1300여 명에 이르는 동명이란 대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5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동안 크고 작은 어려운 일들이 상당히 많았음에도
신동수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 동명은 최고의 엔지니어링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동명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 명성을 널리 떨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링 회사로 나아가는 길,
그 길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선배들이 다져놓은 토양위에
도전과 열정으로 또 하나의 역사를 창조하리라 믿습니다.
이에 동명기술공단 50년은 새로운 시대의 또 다른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그동안 회사발전에 노고를 함께한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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