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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 연재/대마도 탐구

대마도 탐구_9

덕혜옹주의 슬픈 사랑도 침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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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 옆으로 무궁화가 심어져 있다. 뒤편에는 숯을 굽기위해 끌려왔던 동포들과 눈물겨운 헌금을 내었던 동포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완용의 비문이 있는 국분사에서 내려오면 하치만궁이 나온다.
 입구에 세워진 문곽은 일본의 대표적인 오사카성과 같은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나 내부는 고즈넉하다.
 무궁화들이 늘어서 일행을 반기는듯하다. 알고 보니 몇 년 전 안내를 해 주는 황박사가 덕혜옹주를 추모하며 몇 그루 심어놓은 그 무궁화들이다.
 탄생이나 순국을 상징하는 기념비가 아니라 덕혜옹주가 이곳 대마도 도주와 정략결혼을 기념하는‘덕혜옹주 결혼 봉축비’다
 하지만 55년 6월 종무지와 옹주가 이혼한 후 대마도사람들은 비를 뽑아 금석성 풀밭에 내동댕이쳤던 것을 99년 7월 부산 대마도 직항 여객선이 취항하면서 01년 일본인들의 상술로 다시 세워 놓아 지금에 이른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61세 때 양귀인 몸에서 태어난다.
 고종은 이토우히로부미가 아들 영친왕을 일본여성 방자와 강제 결혼시키자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환과 서둘러 약혼을 시킨다.
 그러나 내선일체를 주창하던 일본은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교육시킨다며 13세 때 동경으로 보내진다.
 일본은 결국 대마도 도주의 세손인 종무지 백작과 정략결혼을 시킨다.
 31년 5월 8일 동경서 결혼한 덕혜옹주는 이듬해 8월 정혜라는 딸을 낳는다.
 종무지백작의 유품인 서양화 작품이 대마도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데 힘있는 필체와 수준급 이상의 미술솜씨를 보이고 있다.
 결국 딸도 자살하고 마는데 결혼 후 덕혜옹주의 몽유병이 심해지자 족쇄를 채워 감금을 시키기도 했다.
 패전한 일본은 귀족제도를 폐지하고 덕혜옹주의 남편 종무지도 백작의 지위를 상실한다.
 이후 55년 6월 이혼하게 되고 덕혜옹주는 정신병의 악화로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이후 고종이 약혼시켰던 김장한의 동생 김을한 조선일보 기자가 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기사화하여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다가 62년 1월 박정희대통령이 귀국시켜 7년간 서울대병원생활을 하다가 창덕궁 낙선제서 89년 4월생을 마감하게 된다.
 기념비는 덕혜옹주가 31년 대마도 방문시 대마도에 숯을 굽기 위해 와있던 동포들이 발기인으로 하여 기념비가 세워진다.
 당시 전쟁 물자를 위한 숯을 굽기 위해 대마도에 우리나라 2만 명의 동포들이 끌려와 군사시설, 포대증축 등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77세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 덕혜옹주는 귀국 20년만인 82년에 고국의 호적을 되찾게 된다.
 덕혜옹주의 능은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 홍유능에 안장되어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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