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구국운동의 거두 연암 최익현선생의 영정
국분사에 있는 이완용의 매국행위에 다시금 이를 악다물고 잠시 주변을 바라보며 몇 분 달리다보면 조금은 정돈되지 않은 백제시대의 사찰 수선사가 나온다.
修善(수선)이란 휘호도 조선 헌종 시절의 병조판서 김학진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대마도에서 들렸다가 써준 휘호이다.
이 수선사에는 신라금동 대일여래불이 보존되어 옛 우리나라의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는 곳이 대마도임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최익현선생은 순조 33년(1833년)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 1906년 향년 74세로 순국하였다.
양평의 화서 이항노선생의 문하에서 수학 철정 6년 문과에 급제 1873년 호조판서,1894년 공조판서를 지낸다.
그러나 선생의 일생은 구국의 저항운동으로 평생을 살아온 인물로 평가된다.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하고 위정척사운동을 펼치다 제주도 귀양을 가고 을사녹약이 체결되자 청토 5적소를 올려 을사녹약의 무효를 선포하기도 한다.
망국조약을 체결한 5적의 처단을 주장하다 1906년에는 충남 노성의 궐리사에서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했으며 전북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후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군법회의에서 군율위반죄로 3년형을 받는다.
1906년 7월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대마도로 강제 이송당해 구치소에 수감되고 10월 17일 단식을 시작하여 11월 17일 74세로 순국하게 된다.
시신은 수선사에 5일간 머물다가 아들 최영조옹이 부산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렀다.
수선사 뒤편 어화공원에 최익현선생 추모공원을 설립하자는 뜻이 2000년대 초 결성되어 1만 5천 평 규모에 사당, 기념관, 누각, 팔각정 등을 하기로 했으나 아직도 진척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예산규모가 370억 원 정도라는데 정부도 기업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 독도를 일본인들이 들쑤셔대도 체계 있는 항변과 논리를 갖추지 못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최익현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단식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더럽힐 수 없어 음식을 물리치기로 결심하고 공인들이 몸을 깨끗이 하여 선왕에게 보답하는 뜻을 본받고자 하며 신의 나이 74세이니 어찌 아까운 것이 있겠는가,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수선사 경내에 차분히 가란앉아 이곳을 찾는 후손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듯하다.
일행들은 선생의 영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아직도 추모공원하나 설립하지 못한 죄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
하긴 여기에 와서야 최익현선생이 이곳에 유배되어 단신하다 돌아가심을 알았으니 위대한 인물의 정신을 얼마나 알고 깨달음을 얻었는지,
부끄러운 냥 붉게 피어난 일본산 채송화 꽃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최익현 선생의 눈물 같기도 하고 내 마음의 응어리진 울분 같기도 하고. 일행들은 잠시 경내를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최익현선생의 연륜만큼 깊은 의학박사 윤명 조 박사님도 작은 카메라로 곳곳을 담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가 이 사찰에 최익현선생을 잘 모셔서 감사하다는 감사장이라도 전달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 하는 즉석 의견을 제시한다.
대마도를 다시금 돌아본 사랑의 녹색운동본부에 의해 깊은 고민과 합리적 사고로 집약적인 연구와 다양한 사업들이 전개되리라 본다.
修善(수선)이란 휘호도 조선 헌종 시절의 병조판서 김학진이 일본을 다녀오면서 대마도에서 들렸다가 써준 휘호이다.
이 수선사에는 신라금동 대일여래불이 보존되어 옛 우리나라의 유적들이 산재되어 있는 곳이 대마도임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최익현선생은 순조 33년(1833년)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출생 1906년 향년 74세로 순국하였다.
양평의 화서 이항노선생의 문하에서 수학 철정 6년 문과에 급제 1873년 호조판서,1894년 공조판서를 지낸다.
그러나 선생의 일생은 구국의 저항운동으로 평생을 살아온 인물로 평가된다.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하고 위정척사운동을 펼치다 제주도 귀양을 가고 을사녹약이 체결되자 청토 5적소를 올려 을사녹약의 무효를 선포하기도 한다.
망국조약을 체결한 5적의 처단을 주장하다 1906년에는 충남 노성의 궐리사에서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했으며 전북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후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군법회의에서 군율위반죄로 3년형을 받는다.
1906년 7월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대마도로 강제 이송당해 구치소에 수감되고 10월 17일 단식을 시작하여 11월 17일 74세로 순국하게 된다.
시신은 수선사에 5일간 머물다가 아들 최영조옹이 부산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렀다.
수선사 뒤편 어화공원에 최익현선생 추모공원을 설립하자는 뜻이 2000년대 초 결성되어 1만 5천 평 규모에 사당, 기념관, 누각, 팔각정 등을 하기로 했으나 아직도 진척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예산규모가 370억 원 정도라는데 정부도 기업도 관심을 두지 않으니 독도를 일본인들이 들쑤셔대도 체계 있는 항변과 논리를 갖추지 못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최익현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단식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더럽힐 수 없어 음식을 물리치기로 결심하고 공인들이 몸을 깨끗이 하여 선왕에게 보답하는 뜻을 본받고자 하며 신의 나이 74세이니 어찌 아까운 것이 있겠는가,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수선사 경내에 차분히 가란앉아 이곳을 찾는 후손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듯하다.
일행들은 선생의 영전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아직도 추모공원하나 설립하지 못한 죄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
하긴 여기에 와서야 최익현선생이 이곳에 유배되어 단신하다 돌아가심을 알았으니 위대한 인물의 정신을 얼마나 알고 깨달음을 얻었는지,
부끄러운 냥 붉게 피어난 일본산 채송화 꽃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최익현 선생의 눈물 같기도 하고 내 마음의 응어리진 울분 같기도 하고. 일행들은 잠시 경내를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최익현선생의 연륜만큼 깊은 의학박사 윤명 조 박사님도 작은 카메라로 곳곳을 담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가 이 사찰에 최익현선생을 잘 모셔서 감사하다는 감사장이라도 전달하는 것이 좋지 않는가 하는 즉석 의견을 제시한다.
대마도를 다시금 돌아본 사랑의 녹색운동본부에 의해 깊은 고민과 합리적 사고로 집약적인 연구와 다양한 사업들이 전개되리라 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