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의 위기 홍수
대통령, 총리들이 수시로 찾는 홍수통제소 50년의 길
인공지능(AI) 홍수예보 플랫폼 구축한 한강홍수통제소
홍수통제 역량강화는 수리·수문 분석 전문인력 때문에
한강홍수통제소가 반세기의 고개를 넘고 있다.
한강홍수통제소(소장 홍동곤)는 홍수통제소 50주년을 기념하여 홍수를 포함한 물관리의 역사를 담은 ‘한국의 홍수통제 50년사’ 역사서를 발간했다.
홍수통제소의 설립은 전쟁 이후 경제발전과 함께 홍수관리에 대한 법·제도 정비와 전문 조직이 신설되면서 대규모 수문조사 사업이 활발히 추진되던 시기이다. 1968년에는 태풍위원회가 우리나라의 한강 유역을 홍수예경보 시설 자동화 시범 지역으로 선정하였고, 1972년에는 일본 조사단이 홍수예보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마침 그해 8월에는 한강 유역에서 대홍수가 발생해 큰 피해를 입었고, 이를 계기로 정부는 홍수예경보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이에 따라 1974년에 한강홍수통제소가 건설부 소속으로 개소한 것이 50년 역사의 시작이다. 이후 1987년에 낙동강홍수통제소, 1990년에 섬진강홍수통제소와 금강홍수통제소, 1991년에는 영산강홍수통제소가 차례로 개소되어 우리나라 전역을 관리해오며 오늘에 이른다.
이들 기관은 △전국의 홍수와 갈수 예보, △수문조사와 관측, △국가 수자원 관리와 재해 예방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 홍수통제소는 인공지능(AI) 기반 홍수예보와 댐-하천 가상모형(디지털트윈) 물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등 급변하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홍수 관리의 디지털 전환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번 역사서는 △홍수통제 50년, △분야별 변천사, △물재해 현황 및 홍수통제소의 대응, △물관리 미래 비전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강홍수통제소 홍동곤소장은 “ 극한호우로 발생한 홍수는 소중한 시민의 생명과 재산에 빼앗기도 했으며, 우리는 이를 극복하고 또다시 겪지 않기 위해 처절히 노력했다. 50년사에는 이러한 시련과 도전의 과정에서부터 아픔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계획과 다짐이 담겨 있다. 이제 홍수통제소는 급변한 기후변화와 기상이변에 대응하기 위하여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인공지능(AI) 홍수예보 플랫폼 구축과 댐-하천 디지털트윈 물관리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여기에 도시침수지도와 하천범람지도를 보완하여 도시침수예보체계를 마련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 홍수통제소가 앞으로 개척해 나가야 할 분야는 무궁무진하다.”라고 어제,오늘,내일을 아우렀다.
김완섭장관은 “올해는 홍수대응을 강화하기 위해 인공지능 홍수예보를 통해 본류 중심의 75곳에서 지류·지천 포함 223곳으로 대상 지점을 3배 정도 확대하고 홍수특보를 신속하게 발령하여 홍수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홍수에 취약한 258개 지방하천에 수위관측소를 추가 설치하여 내년부터 전국 931개 지점에 대해 실시간 하천홍수를 모니터링하고 홍수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다. ”라며 환경부의 수자원관리에 대한 새해 설계를 제시했다.
동작동 한강홍수통제소 3층에는 환경부장관,차관실과 회의실이 있어 환경부의 국무회의와 국회활동의 전진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홍수통제소는 장관은 물론 대통령과 총리들이 여름이면 수시로 들려 현장에서 상황보고를 받는 중요한 상황실이기도 하다.
1981년에는 전두환 대통령(태풍 아그네스), 1990년에는 노태우 대통령(한강대홍수,고양시 일산제 붕괴), 2008년과 2011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중에 집중호우로 재임 중 두 차례나 방문했다. 2008년과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이 홍수와 관련 심도 있는 현장 회의로 청와대 집무실이 되기도 한 곳이다.
1992년에는 정원식, 1993년 황인성, 1995년 이홍구총리는 홍수기 사전점검, 2000년 이한동 총리는 태풍 프라피룬, 2006년 한명숙 총리는 태풍 예위니아, 2009년 한승수, 2020년 정세균총리는 집중호우로 22년과 24년 올해는 한덕수 총리가 두 번씩이나 방문했다.
2012년에는 태국의 홍수 관련 부처 장관과 국가 연구소장들이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와 함께 홍수통제소를 방문하고 우리나라 대표로는 권도엽 국토부장관이 배석했다.
<한강홍수통제소 대통령,총리 방문일지>
연도 | 대통령,총리 | 방문사유 |
1981년 | 전두환대통령 | 18호 태풍 아그네스 |
1990년 | 노태우대통령 | 한강 대홍수 |
1992년 | 정원식 국무총리 | 홍수기 사전점검 |
1993년 | 황인성 국무총리 | 홍수기 사전점검 |
1995년 | 이홍구 국무총리 | 홍수기 사전점검/태풍 제니스 |
2000년 | 이한동 국무총리 | 12호 태풍 프라피룬 |
2006년 | 한명숙 국무총리 | 7월 집중호우 태풍 에위니아 |
2008년 | 이명박 대통령 | 7호 태풍 갈매기 및 집중호우 |
2009년 | 한승수 국무총리 | 7월 집중호우 |
2011년 | 이명박 대통령 | 7월 집중호우 |
2012년 |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 | 관리시스템견학 |
2020년 | 장세균 국무총리 | 8월 집중호우 |
2022년 | 한덕수 국무총리 | 8월 집중호우 |
2024년 | 한덕수 국무총리 | 홍수기 사전 점검 |
물관련 시설에 대해 대통령들의 내왕을 보면 당시에 국가가 어느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댐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정수장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주로 방문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이후에는 국무총리조차 정수장 방문은 쉽게 찾기 어렵다. 당시의 상,하수도와 댐은 국가 기간산업으로 매우 중요했고 물이용에 대한 안정적 용수확보와 물처리는 국가가 총력을 기울였다는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홍수통제소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더욱 더 국가적 중요 시설물로 떠 오르면서 대통령과 국무총리,국회 당대표들이 수시로 찾는 곳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홍소통제소는 조직이나 인력, 재원에서 매우 미흡한 기관이었다. 과거에 대해 섬진강 홍수통제소장을 역임한 이재형씨는 “홍수통제소에 발령(86년)을 받고 첫 출근한 당시의 기억으로는 조직의 생기도 없고 직원들조차 업무에 의욕이 없어 보였다. 당시 한강홍수통제소는 물과 관련된 전문가가 근무하는 곳이 아니라 특정분야에 관심이 있는 몇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아 쉬려고 지원을 하거나 좌천된 사람들이 근무하는 곳이라고 여겨졌다. 나 역시 물에 관심이 있어 지원한 것이 아니라 부산국토관리청에 근무할 당시 공사업무가 도대체 적성에 맞질 않아 지방청이 아닌 어디든 보내달라고 청원한 것이 홍수통제소로 오게 된 이유이다. 고양시 일산제가 붕괴되던 ’90.9.9~9.12일 대홍수시에도 오롯이 혼자 홍수예보를 담당하였다. 한강대교(인도교) 지점에 홍수경보 1, 2호를 연이어 발령하고 남한강 여주지점에도 홍수경보를 2회 발령하는 등 당시 긴박한 상황 속에 중앙재해대책 본부와 언론에서는 시시각각 한강수위 변화에 대하여 문의 전화가 빗발쳤으나 홍수예보 업무를 인계할 사람이 없었기에 혼자 사흘 동안 집에도 가지 못하고 밤을 센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고백한다.
한강홍수통제소장으로 정년퇴임한 정희규씨는 세계적 수준의 홍수통제, 수문조사 역량을 만든 사람들을 이렇게 조명한다.
“1960~1970년대에 시작된 다목적댐 건설과 연계한 홍수통제소 설립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결정이다. 통제 불가능한 신의 영역이었던 홍수위를 점차 통제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2004년경은, 기본 틀이 마련된 홍수통제 역량을 질적으로 한 단계 높여야 할 시점이었다. 홍수 시뮬레이션 정밀도 향상, 홍수예보 제때 발령을 위해서는 순환보직이 불가피한 일반직 직원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므로 전문적인 수리·수문 분석 역량을 갖춘 인력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홍형표 하천관리과장이 해결사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기통신직, 행정직 인력 감축 등 어려운 절차를 거쳐 귀중한 연구직 인원을 확충하고 하천정보센터를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충원된 전문인력들이 현재의 발전된 홍수통제소를 만들어 나가는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순환 근무하는 일반직 직원만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성과이다.”라고 술회했다.
한강홍수통제소장을 역임한 환경부 주요 인사로는 곽결호(1993년.11대,환경부장관역임),류영창(2009년,31대,상하수국장역임),박하준(2013년,35대,수자원정책국장역임),박재현(2018년,36대,물관리정책실장),홍정섭(2019년,37대,물관리위원회단장),유명수(2020년,38대,국립환경과학원,기후대기연구부장),정희규(2021년,40대,물환경정책과장),홍동곤(2023년,42대)등이다.
조선시대의 홍수에 대한 대응 기록을 보면 태종 10년(1410년) 5월,7월,8월에 대홍수 피해를 입게되자 태종 11년에 청계천 대공사 계획을 수립하여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고 1992년부터 2천여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장의동에서 종묘까지 제방을 축조하기도 하여 홍수예방을 위한 개선공사 사례로 꼽힌다.
당시의 홍수와 관련 기록을 승정원일기와 조선실록을 보면 ▴1404년(8.31-9.2/태종 갑신년) 성안의 하천변 주민 67명이 떠내려가고 시가지가 침수되어 수심이 10여척이 되었고 익사자가 116명 발생▴1410년(8.26/태종 경인년) 자종류 동쪽부터 홍인문까지 사람 통해 금지▴1417년(10.6/태종 정유년) 10월 5일부터 8일간 큰비로 시가지 침수가 30리나 됨▴1421년(6.12/세종) 교량이 범란하고 하류의 민간 75호가 떠내려가 익사자 다수 발생▴1441년(9.2/세종,신유년) 성안의 인가 3척이나 침수,한강변 바위에 표를 세워 눈금을 새겨넣어 수위를 관측하여 호조에 보고함▴1459년(7.26/세조 기묘년) 수심이 4,5척이나 되고 사람들이 떠 내려감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1472년 7월9일(성종,임진년)▴1520년 7월10일(중종)▴1544년 7월15일(명종,갑인년)▴1641년 7월8일(인조,신기년)▴1642년 7월25일(인조,임오년)▴1654년 6월8일(효종)▴1668년 7월16일(현종,무신년)▴1683년 7월29일(숙종 계해년)▴1698년 8월23일(숙종 무인년)▴1702년 8월27일(숙종 임오년)▴1709년 6월16일(숙종)▴1746년 7월7일(영조)▴1752년 8월1일(영조 임신년)▴1817년 9월1일(순조,정축년)▴1821년 8월12일(순조)▴1832년 7월5일(순조,임진년)▴1846년 11월 9일(헌종,병오년)
일제 강점기에는 ▴1915년 7월23-24일 경기,강원지역300-380mm, 8월22,23일 한강중류 이남 262mm폭우▴1916년 6.13-14일 집중호우로 인명피해 10명, 가혹침수 1,564호▴1919년 7월 한강수위 8.89m상승 ▴1920년7월 영월,제천 500mm강우(한강수위 10.03m)등으로 피해를 보자 국내에서는 최초로 동아일보가 주도하여 수제의연금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다.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폭 30cm,높이 160cm)는 송파구 송파1동 113번지 백제고분로 변 보도상에 세워져 있다.
<한국의 100년간 주요 홍수피해현황>
발생년도 | 재해명 | 피해지역 | 최대일강우 | 인명피해 | 재산피해 | 발생기간 |
1915년* | 경기강원호우 | 경기,강원 | 380mm | 7.23-7.24 | ||
1915년* | 한강중류 | 한강중류이남 | 262mm | 8.22-23 | ||
1920년* | 영월제천호우 | 영월제천 | 500mm | 7월 | ||
1925년 | 을축년대홍수 | 중부지역 | 650mm | 517명 | 0,89억원 | 7.16-7.18 |
1934년 | 남산대홍수 | 남부지역 | 743.9mm | 198명 | 197억원 | 7.17-7.25 |
1959년 | 태풍‘사라’ | 영동,영,호남 | 168.1mm | 849명 | 662억원 | 9.15-9.17 |
1972년 | 안양시흥지구 | 중부,강원 | 313.6mm | 550명 | 265억원 | 8.18-8.20 |
1979년 | 태풍쥬디 | 남부지역 | 340.5mm | 136명 | 502억원 | 8.24-8.26 |
1980년* | 중부지방호우 | 경기,충남,충북,강원 | 302mm | 189명 | 1,837억원 | 7.1-7.23 |
1984년 | 84대홍수 | 수도권,강원 | 314.2mm | 189명 | 1,643억원 | 8.31-9.4 |
1987년 | 태풍셀마 | 남해,동해 | 216.8mm | 345명 | 3,913억원 | 7.15-7.16 |
1987년* | 중부지방호우 | 강원,충북,충남 | 637mm | 167명 | 3,385억원 | 7.21-7.23 |
1989년* | 영호남호우 | 경기,강원,충청,전라,경상 | 599mm | 130명 | 1,706억원 | 7.25-7.27 |
1989년* | 태풍‘쥬디’ | 전남,북,경남 | 408mm | 32명 | 1,691억원 | 7.28-7.29 |
1990년 | 90한강대홍수 | 한강유역 | 330.8mm | 163명 | 5,203억원 | 9.9-9.12 |
1991년* | 중부호우 | 경기,강원 | 308mm | 70명 | 1,113억원 | 7.20-7.26 |
1991년* | 태풍‘글래디스’ | 부산,경남,북,강원 | 439mm | 103명 | 2,357억원 | 8.23-8.26 |
1995년 | 태풍재니스 | 중부,강원 | 361.5mm | 65명 | 4,562억원 | 8.19-8.30 |
1996년 | 경기강원북부 | 강원,경기 | 268.0mm | 29명 | 4.275억원 | 7.26-7.28 |
1998년 | 호우 | 전국 | 481.0mm | 324명 | 12,478억원 | 7.31-8.18 |
1999년 | 태풍,집중호우 | 전국 | 280.3mm | 67명 | 10,490억원 | 7.23-8.4 |
2002년 | 태풍‘루사’ | 전국 | 870.5mm | 246명 | 51,479억원 | 8.30-9.1 |
2003년 | 태풍‘매미’ | 전국 | 453.0mm | 131명 | 42,225억원 | 9.12-9.13 |
2006년 | 태풍예위니아 | 전국 | 264.5mm | 62명 | 18,344억원 | 7.9-7.29 |
2016년 | 태풍‘치바’ | 경남,경북,제주,전라,인천 | 220.5mm | 9명 | 1,859억원 | 10.3-10.6 |
2019년 | 태풍‘미탁’ | 전국,서울,인천,대전,세종제외 | 110.5mm | 25명 | 1,677억원 | 9.28-10.3 |
2020년 | 집중호우 | 전국 | 289.4mm | 57명 | 10,371억원 | 7.28-8.11 |
2022년 | 집중호우 | 서울,경기,강원,충남 | 381.5mm | 19명 | 3,155억원 | 8.8-8.17 |
*국립기상과학원의 ‘한반도 100년의 기후변화’와 환경국제전략연구소가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연평균 기온은 13.2℃ 이고 연 강수량은 1237.4㎜이다. 최근 30년 기온은 과거보다 1.4℃ 상승, 강수량은 20세기 초 보다 124mm 증가하였고, 변동성이 매우 크다. 여름은 19일 길어졌고 겨울은 18일 짧아졌다.
조선시대 홍수는 총 23건중 7월이 10회(44%), 8월이 6회, 6월 3회, 9월 2회, 그리고 10월과 11월 각 1회 씩 발생했다.
반면 최근 100년간의 대홍수는 29건중 7월이 14회(48%), 8월이 9회, 9월이 4회, 그리고 6월과 10월에 각 1회씩 발생했다.
시기적으로는 40년대와 60년대에는 대규모 홍수가 없었으며 20, 30, 50년대는 연대별 1건 정도씩 발생했다. 70년대는 2건이 발생했으나 80년대는 6건으로 크게 늘었다. 90년대는 7건이 발생했으나 2000년대는 3건, 2010년대는 2건, 2020년대는 현재 2건이 발생하고 있다.
인명피해로는 1959년 태풍 ‘사라’로 인한 피해가 849명으로 가장 컸으며 1972년 550명,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517명, 1998년 324명등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인명피해는 줄고 있으나 재산피해는 점차 증가되고 있는 경향인데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51,479억원, 2003년 태풍 매미로 42,225억원의 피해를 보았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 국회 김동환, 김승배 기상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