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샘 김동환의 수상한 발걸음- 각설이 타령,카바레, 창녀촌,영등포시장을 거닐다
영등포 시장 주변도 하나,둘 철거가 시작되고
석면 노출 피해인정자는 총 6,743명에 달해
창녀촌,카바레,품바공연장도 언제가는 철거가
영등포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등포시장을 중심으로 도시재개발사업이 13개 공구로 나뉘어 단계적으로 진행중에 있기 때문이다.
기존 건물을 철거하기 위해서는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에 따라 철거,해체시 고용노동부로부터 등록된 석면업자로부터 석면조사를 실시하고 석면이 제거된 후 철거 공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석면감리원이 상주하면서 건물철거전의 석면감리를 위해 환경부 출신의 이영열 석면감리원이 상주하는 현장 사무소를 찾아 가는 길이다.
석면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전만 해도 슬레이트(석면)조각에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직은 술 한잔 마실 수 있는 정도로 건강을 지탱하고 있다.
2023년 3월, 환경부는 ‘중장기 주택 슬레이트 철거 목표’를 세우고 전국에 남아있는 57 만동의 주택 슬레이트를 2033년까지 완전히 제거하기로 했다.
슬레이트 처리 지원 사업은 석면으로부터 국민건강 피해 방지를 위해 1970년 대 전후 널리 보급된 노후 슬레이트 철거․처리 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하는 제도다. 환경부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29만동의 주택 슬레이트 철거를 지원했다.
국비지원은 50%로 23년에는 국비 849억원과 지자체 경상보조로 지원된다.
지난 22년 지원내용을 보면 주택 철거 지원은 취약계층 전액, 일반가구 동당 최대 352만원, 창고․축사 철거 지원( 슬레이트 면적 200㎡ 이하), 지붕개량 지원은 취약계층 동당 1천만원, 일반가구 동당 300만원이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관리하는 석면피해 의심자 지원에서 2022년에는 총 1,019명을 석면피해자로 인정했으며 2,916명의 피해자와 유족에게 구제급여 총 271억원이 지원되었다. 그동안 석면 노출로 인한 피해인정자는 총 6,743명에 달한다.
영등포 시장 주변은 즐비한 술집과 식당을 자주 찾던 길이었는데 재개발로 조만간 사라진다니 무더운 한낮의 열기를 감싸안고 영등포시장 주변을 발길 가는데로 둘러보기로 했다. 여의도에 위치한 독서신문에서 오소백 편집국장과 함께 편집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영등포시장은 안방처럼 들락거렸던 곳이다.
영등포구는 원래 시흥군 영등포면이었으나 1931년 4월 영등포읍으로 승격되고 시흥군청 소재지였다.
1936년 4월 시흥군 북면,동면 일부와 함께 경성부로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가 설치되었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10월 영등포구로 개편되고 1973년 관악구가 분리되고 1977년 강서구, 1980년 4월 구로와 동작구가 분리되었다,
영등포역은 철도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과거 90년대까지는 동양맥주,경성방적,방림방적,영등포공작창등 많은 대규모 공장들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영등포역에서 13공구의 석면철거 현장으로 가는 길은 지하상가를 택했다.
옷이나 신발,모자,화장품,선글라스,가방,악세사리등이 청계시장이나 동대문시장을 연상하게 하지만 1만원 내외로 써 붙인 가격표가 눈에 들어온다.
백화점에 진열되었다면 수십만원으로 가격표가 오를듯한 제품들도 있지만 이름값(상표)을 하는지 월등한 품질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서민적인 가격의 상품들을 둘러 보다가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화려한 진열대를 신비롭게 바라 보았다.
마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역을 나오면서 안네 프랑크의 집으로 가는길에 성인용 섹스용품이 진열된 상가를 들러 보았던 놀램과도 흡사하다 라틴,모던,벨리등 화려한 댄스복들이 원색의 물결을 이루고 있는 영등포지하상가.
지금도 이곳 영등포 시장 주변에는 백악관,카네기,금마차 카바레가 영업중이고 콜라텍도 스무곳 정도가 성업중이란다.
한국일보 편집차장이던 소설가 김일주 선배에 이끌려 낙원상가 카바레로 난생처음 끌려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선배는 워낙 춤을 즐겨 자주가는 단골카바레여서인지 위치도 좋은 무대앞으로 안내받아 자리를 잡았다.
오자마자 일주선배는 춤추러 나가고 홀로 홀작홀작 술만 마셨다.
건너편 테이불에 엄청나게 미인인 여인이 연신 나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이 환장하도록 예뻤다. 조명 아래서인지 취기에서인지 하여간 예쁜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술을 따르다가 춤을 추자고 말한다. 춤과는 얼씬도 못한다며 손사례를 쳤지만 결국 끌려나가 난생처음 무대에 섰다.
그녀의 신발만 서너번 밟았던 아찔한 기억만 나고 곡이 끝나기만 간절하게 기다리다 혼비백산 자리로 돌아왔다.
춤을 췄던 일주 선배가 자리에 돌아와 한마디 한다.
“ 야, 그 여자 유명한 꽃뱀이야. 나 없었으면 너는 홀랑 털렸어. 춤추면서 웨이터한데 동행한 손님이라고 알리라고 말했어. 그래서 얌전히 물러 난거야”라고 말한다.
예쁜 환영은 산산조각 났고 취기도 사라졌다.
신문사를 담당했던 안기부 출신의 모 인사가 “우리나라도 교육시간에 기초 춤 교습을 배워야 해. 전 세계 어느 나라나 춤은 기본으로 배웠어, 사회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야.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가장 난감한 것은 파티때 춤을 제대로 못 춘다는 거야”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상하수도 분야에서 독창적인 기술로 성공하여 상장까지 했던 아세아 조인트 민신웅 회장이 그 많은 여인들과 춤을 추며 노년의 여유로움을 보여줬던 모습은 아름답기 조차 하다.
다시 태어나면 춤부터 배우리라 부처님에게 기원드렸던 적이 어디 한 두번인가. 결국 아직도 춤은 배우지 못했다.
과거 이곳 주변에는 방적공장 근로자들과 밀링머신,인쇄소,봉제공장,철공소등이 즐비하고 이웃 대방동에는 육군본부가 있어 군인들의 왕래도 많은 곳이긴 하지만 댄스복 전문상점이 지금도 저토록 즐비하니 장사가 되긴 되나보다,
극단 집현전의 조연출을 맡아 기획하면서 배우들의 번쩍이는 의상을 잠시 입어보기도 했지만 원색의 현란함은 이냥 쑥스러워진다.
화려한 꽃을 보면 슬며시 미소 속에 감탄사부터 나오는데 화려한 옷은 왜 이다지도 부끄러워질까.
무심한척 두번씩이나 둘러보고 흑염소전문 식당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환경전문가들과 담소를 나눴다.(신찬기박사,이영열 감리원,오수태,전성환박사)
흑염소 식당 옆에는 1971년대 화려하게 지어진 8층 고급 맨션‘동남아파트가 올려다 보인다, 32평 임대료가 3천만원 보증금에 70 만원 하는데 4층부터 8층까지 60세대가 살고 있다고 한다.
동남아파트 초입에는 각설이타령(품바)공연장과 동남콜라텍이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콜라텍 입장료는 2천원이란다.
각설이 타령은 서대문에 위치한 푸른극장에서 고인이 된 희곡작가 조일도 선배의 연출로 ’품바‘라는 제목으로 서울에서 첫 공연을 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각설이타령(품바)은 입장고라고 불렸는데 입에서 뀌는 방귀란 뜻으로 품바는 일인극이다. 식민지 시대 전국을 떠돌며 살다간 각설이 패 대장의 일대기를 무안군 일오읍 인의예술회 김시라의 연출로 향토 창작 연극제에서 1982년 12월 초연되고 4천여회 이상 공연한 대표적 향토극이다.
무안군 천사마을에는 1천여명의 거지들이 모여들어 천사마을을 형성하기도 했다.
아무튼 김시라씨를 서대문으로 끌어 올려 공연한 품바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후에는 짝퉁 품바가 여기저기서 공연되기도 했다.
조연출이라는 타이틀로 홍보전략에 잠시 참여하면서 김시라씨와 술잔을 나누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언제 한번 각설이공연장을 찾기로 했지만 이곳도 언젠가는 헐려 버리고 공연장도 사라질텐데 또 얼마나 많은 석면가루가 날릴까. 문을 닫은 상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신세계백화점 뒤편에 위치한 홍등가(창녀촌)로 발길을 옮겼다.
여성가족부가 조사한“전국 성매매 집결지”를 보면 서울은 용산역전,청량리588,영등포역 앞,천호동 텍사스,미아리 텍사스,이수역 팔팔 골목,부산의 완월동,범전동,해운대,대구의 자갈마당,인천의 엘로하우수,학익동,광주의 금남로5가(황금동),무등로,수원역전등 전국에 45개가 있다고 발표한바 있다.
아직은 영업시간이 아닌 창녀촌은 하얀색으로 통일하여 다른 주택들과 차별화 하였다.
창녀촌을 거닐면서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창녀촌을 찾았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1969년 가을 밤이다.
노동자들이 입는 허드레 가을 잠바를 입고 중절모를 쓴 대통령이 박종규 경호실장과 비밀 경호원만 대동하고 청와대 문을 나섰다.
박정희대통령은 서울에서 가장 큰 창녀촌인 서울역 앞 양동골목으로 들어섰다.
서울에는 종삼으로 불리는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창신동 창녀촌이 있었다.
붉은 전구불이 골목길을 비추는 사이사이마다 여인들이 튀어나오고 옷소매를 당긴다. 몇 번 뿌리치다가 아예 온몸으로 껴안는 앳된 아가씨를 따라 창녀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타임은 200원,긴 밤은 1천원인 비좁은 양동의 밤은 아침 기차를 기다리는 나그네(대통령)와 창녀와의 소주잔 대화는 깊어만 갔다.(1960년대 후반의 쌀값은 5,700원)
“아저씨,여기 포주들이나 경찰, 정화위원도 모두 도둑이예요. 지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우리를 감시하고 뜯어먹고 단속 나온다고 알려주고 숨기고 모두 도둑놈 강도들이예요, 아저씨는 대통령하고 비슷하니깐 이야긴데 대통령도 도둑놈이에요.모른 체하면 모두 도둑놈이지 뭐. 나는 미용기술이라도 배워서 미장원 한번 차려보고 싶은 것이 꿈인데....”
스르르 잠든 창녀의 방을 빠져나온 청와대의 새벽은 내무부장관을 비롯하여 관계기관장들이 줄줄이 불려왔다.
“임자들은 회전의자에서 폼만 잡으면 끝나는 줄 알아”-
그때부터 갈 곳 없는 창녀들을 보호하는 장소가 만들어지고 미용기술을 비롯한 생계형 교육의 실질적인 변화가 이뤄지기 시작한다. 산업화에 따라 전문 인력이 태부족인 현실에서 1967년 제정된 직업훈련법이 2년이 지나서야 실지로 가동되기 시작했던 양동의 새벽이었다.
영등포시장에서의 하루는 40여년간의 한국 현대사의 현장을 되돌아보게 한 길고 긴 여행이었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 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 소장,환경경영학박사,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