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샘의 문화의 뜨락-외암마을
빚더미에 낡아가는 외암민속마을 건재고택
예금보험공사 경매 추진 집행정지 소송
외암민속마을의 아픔 건재고택 살릴 수 없나
아산시의 자랑거리이기도 한 국내 7대 민속마을중 하나인 외암민속마을의 중심적인 고택인 건재고택이 경매와 소송으로 빗장을 걸어 잠가 점차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의 민속마을로 보존되고 있는 곳으로는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위치한 외암마을을 비롯하여 경북 경주시 강동면의 양동마을,경북 안동시 풍천면의 하회마을,제주시 성읍 민속마을, 경북 영주시 문수면의 무섬마을,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왕곡마을,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등이다.
도별로 보면 경북에 3곳,전남 1곳,강원도 1곳,제주 1곳,충남 1곳으로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충남 아산시의 외암민속마을이다.
아산 외암마을(牙山 外巖마을)은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위치한 민속마을로 2000년 1월 7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이 외암마을의 상징적인 고택인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233호)인 건재고택이 최근까지 주인을 잃고 빗장을 걸어 잠근채 낡아가고 있어 향토학자는 물론 외암마을을 찾는 사람들에게 또다른 경제적 비애감을 던져주고 있다.
외암민속길 19-6에 소재한 건재고택은 조선 후기 대학자인 외암 이간 선생이 태어나고 건재 이상익이 1869년 재건축한 고택으로 146년의 역사를 지닌다.
중요 민속자료 제233호로 지정된 건재고택은 외암리를 대표하는 가옥으로 영암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집을 지은 건재 이상익(1848~1897)이 영암 군수를 지냈기 때문이다.
건재 이상익선생이 일본유학후 일본의 조경문화와 한국의 정통가옥양식을 혼합한 건재고택은 한국 정통가옥 마당은 조경을 하지 않고 있지만 건재고택은 앞마다에 소나무와 작은 연못등과 조경수를 심어 조선말기의 조경의 인문학적 사료로 조경학자나 건축학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주고 있는 가옥이다. 하지만 고택을 지키던 후손이 빚 때문에 그 소유권이 2009년 미래저축은행으로 넘어갔다.
그 뒤 수백 억 원의 고객 돈을 빼돌려 구류생활을 한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지인들을 초청해 흥청망청 여흥을 줄기는 술자리 파티장으로 전락했다. 미래저축은행이 부실대출 등 각종 비리로 직격탄을 맞은 뒤에는 2012년 4월 경매물건으로 예금보험공사가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아산시와 많은 문화인들이 건재고택을 되살리자는 민원에 따라 지난해 문화재청은 건재고택 매입을 위해 국비 36억 원을 편성하고 경매물건으로 나온 건재고택을 경매에서 낙찰받아 매입 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관리를 맡겨 활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지난해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서 진행중인 건재고택의 경매는 낙찰자가 없어 두 번 유찰되었지만 조모씨가 경매집행에 이의가 있다며 건재고택의 주 채권자인 예금보험공사를 상대로 2016년 7월 27일 법원에 소장을 접수했고 이 소송으로 건재고택 경매는 지난해 8월 이후 전혀 열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중단 방문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여 자본시장인 현실에서 문화재도 경제논리에 밀려 국민과 불통의 길을 걸어간다는 점에서 가슴을 아리게 한다.
설화산(雪華山) 기슭 경사지에 위치한 외암마을은 약 500년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며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정이 이주해 오면서 예안 이씨가 대대로 살면서 부락을 이뤘다.그 후 이정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점차 양반촌의 면모를 갖췄으며 이정의 6대손인 이간이 호를 ‘외암’이라 지은 후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 불렀다.
외암마을에는 69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농가 38가구, 농사를 짓지 않는 가옥이 31가구이며 거주민은 약 230여명이다. 마을 내 가옥 수는 모두 213동이며 그중 기와 건물이 57동, 초가 128동, 기타 28동이다. 1990년까지 가구 수의 절반 이상이 예안 이씨였는데 계속 줄어들어 현재 36퍼센트 정도이다.
우리나라 전통 마을에는 다리를 건너기 전 효자, 효부의 정려각이 있기 마련인데 외암마을에는 안동 권 씨의 정려각이 있다. 권 씨는 예안 이씨 이용덕에게 13세 때 시집왔는데 불행하게도 다음 해에 남편이 요절했다. 청상과부가 된 권 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가사를 이끌다 86세에 사망했는데, 이것이 알려져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자 1978년에 정려각을 세운 것이다. 외암마을 초입에 장승과 솟대도 세워져 있는데 마을 입구를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영암댁·참판댁·송화댁,교수댁 등의 양반주택과 50여 가구의 초가 등 크고 작은 옛집들이 상당부분 원래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으며 그 후손등 실제 주민 230여명이 살고 있다. 양반집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특색있는 정원이 당시 양반의 생활모습과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초가는 예스러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매년 10월 전통문화(관·혼·상·제)와 농경문화, 민속놀이 등을 체험 할 수 있는 짚풀문화제가 열면서 초가지붕을 교체한다. 마을을 안고 있는 설화산은 돌이 많아 밭을 갈면서 파생된 돌들을 담을 둘러쳐 높고 넓은 면적의 돌담과 6백년 수령의 느티나무등은 마을을 아름답게 장식한다.설화산의 화가 불화자 발음과 동일해서인지 불을 두려워한 마을 주민은 마을 주변으로 물길을 열어 화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주술적 마을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설화산에서 흘러 지하수로 솟는 지하수를 음용수로 사용하지만 민박철에는 지난 16년 개통된 상수도물을 겸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외암마을 입구에 있는 반석과 석각도 자랑거리로 물레방아와 정자 아래 개천 바닥에 반석이 깔려 있고 마을 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란 글이 새겨진 석각이 있다. 외암동천은 높이 52센티미터, 너비 175센티미터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인 이용찬이 동화수석은 높이 50센티미터, 너비 2미터로 예안 이씨인 이백선이 썼다.
(환경국제전략연구소/길샘 김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