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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노의 실전 우리검도-4-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연재-검법(검도)은 한국이 탄생시켰다-이국노의 실전 우리검도-4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일본 검도복 하까마와 고구려 검은옷

 

 

백제는 왕인(王人) 선생을 통해 일본에 글자를 전하고 가르쳤다. 근초고왕은 현 일본의 국보급 칼 칠지도를 선물하였다. 일본에서 저술한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라는 책에는 성시, 악률, 병법, 불교, 바둑, 장기 등을 백제에서 전해왔다고 스스로 인정하여 그 당시 일본이 백제의 속국이었음을 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문화도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이 지금도 계속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검은 옷을 입은 무사의 집단 조의선인은 신라의 화랑도와 비교되고 있으나 현대 일본의 검은색 검도복 하까마는 이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의 명인 심수관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후예이다. 이렇듯 긴 세월동안 많은 문물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영조 24(1748) 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서기들이 필담을 나누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기국서(紀國瑞)라는 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고려사(高麗史)〉〈여지승람(輿地勝覺)〉〈고사촬요(攷事撮要)〉〈병학지남(兵學指南)〉〈징비록(懲毖錄)〉〈황화집(皇華集)〉〈보한채집(保閑蔡集)〉〈퇴계집(退溪集)〉〈율곡집(栗谷集)등등을 보았고, 상월신경(上月信敬)이라는 일본인은 성학십도(聖學十圖)〉〈계몽전의(啓蒙傳疑)〉〈주서절요(朱書節要)〉〈천명도(天命道)〉〈자성록(自省錄)등 퇴계선생의 글과 율곡선생의 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계몽보요해(啓蒙補要解)등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다른 책이야 그다지 관계없지만 병학지남(兵學指南)〉〈징비록(懲毖錄)은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하는데 간사한 자가 왜관에 팔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보고 울릉도에 대한 말을 했다는 것은(공도_空道 정책과 왜관_ 일본인 거주) 우리나라의 무예가 자연스럽게 건너간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삼국지고구려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를 편다현재 세법의 직부송서세의 자세이며 주서(周書)백제 사람은 배알하는 예()가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경의를 표한다.”고 하였으며 지금도 무변(武弁)이 재상을 뵐 때 아직도 그렇게 한다. 이것이 중국과 달라서 역사서에 기록한다고 했다.

일본의 옛날 사무라이(무사)가 쭈그리고 앉아 두 손을 앞으로 땅을 짚고 납작 엎드려 윗사람에 대한 예를 올리는 것과 백제에서 건너갔다는 일본씨름(스모) 판에서 두 손을 땅에 짚고 인사하는 풍습과 요대 없는 심판의 옷과 머리에 쓴 고깔(모자)이 백제에서 전해진 풍습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는 현대 검도 시합에서 숀쿄(蹲踞)’라는 시합 전 예에 가까운 대적 인사 방법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고구려의 인사 방법은 시급을 다투는 전쟁터에서 직부송서라는 군령, 사령을 받는 긴장을 풀지 않는 자세와 같다. 아무리 현대의 검도가 일본화되었지만 뿌리는 한번 보아야 한다. 글도 모르는 사람의 기록이 있을 수가 없다.

삼한 시대부터 이어진 풍속물 중 솓대또는 솟대라는 것이 있다. 이 솟대는 각 동네 입구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뒤편에 여러 가지 색으로 된 긴 나무를 박아 세워 놓고 그 위에 세로로 수평 또는 각을 주어 1m정도의 나무토막을 얹어놓았다. 마을에 들어 설 때 첫 번째 보이는 풍물이다. 그것도 여러 개를 집단으로 하고 나무 끝을 독수리, 매 등 새 모양으로 해놓았다. 백제를 상징하는 매는 형형색색이다. 이는 마을을 수호하고 지키며 외부로부터의 잡신(귀신)을 물리치는 강력한 의지의 민속 신앙이다. 첫 번째 신이며 불장의 사천왕이다. 한마디로 예도(銳刀, 조선세법)의 첫 번째 지검대적세가 거정세(擧鼎勢)의 거정격(擧鼎格)이다.

이 거정세의 첫 번째 정격(鼎格)으로 위를(上格) 쳐죽이고 군란세(칼 털이, 혈진)로 마무리 한 것인데 일본의 고류 거합도(居合道), 입업(立業) 첫 번째 1번에 상정되었고 앉아서 하는 거합(居合) 1번에는 조선세법 1번 거정세의 두 번째 평대세(平臺勢)로 중살(中殺)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다만 마무리의 군란세를 문파에 따라서 혈진(칼 털이)을 만들어 모방을 감추려 했거나 아니면 더욱 더 발전시킨 예술작품 또는 소비자에 대한 무게 있는 볼거리로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예도(조선세법)의 군란세를 혈진으로 그대로 하는 문파도 있다. 앞으로 나오겠지만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수많은 일본검도 대가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일본검도형(日本劍道形_) 대도 7본과 소도 3본은 칼의 이치와 동작도 거합도(居合道)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본국검(本國劒)이나 예도(銳刀, 朝鮮勢法)와 중복되어 있어 원조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광해군 때(1610) 최기남이 쓴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에는 왜검의 지검대적세는 현재의 일본 상단세 또는 거정세와는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우리의 검법(劍法)을 일본은 자신의 것과 혼합하여 신 검법을 만든 것이 현재의 일본검도가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검법에 대한 재현과 발전이 우리의 것을 찾는 것보다 중요하므로 더욱 더 발전된 일본검도를 우리 전통검법과 함께 융합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중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솟대를 세워 우선 잡신을 물리쳐 마을을 보호하고 그 기세를 앞세워 진취적인 문화를 영위했던 평대의 역사적 의미로 말이다.(환경국제전략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