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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검법(검도)는 한국이 탄생시켰다-이국노의 실전 우리검도-1

연재-검법(검도)는 한국이 탄생시켰다-이국노의 실전 우리검도-1

 

*전통 검법의 바른 원리

실전 검도 이야기

이국노 8단의 역작- 실전 우리 검도-

510/전체 칼라/도서출판 직지/65천원




 

검법(劍法)의 시원(始原)

 

 

조의선인(皁衣仙人)

삼한시대 마한의 국력은 강대하여 진한, 변한의 조공을 받았다고 한다. 이 마한은 고구려와 백제로 성장하고, 진한과 변한의 일부가 고대국가로 발전하여 신라가 된다.

고증에 의하면 고구려의 상징은 다리가 3개 달린 까마귀를 붉은 태양 앞에 놓아 상상적 신인 국조로 삼았다. 한편 고구려에는 선배라는 무사 제도가 있었다. ‘선배는 이두 문자로 선인(先人) 또는 선인(仙人)이라고 썼으며 신수두(臣蘇塗)’라는 단전(檀前)’에서의 경기대회를 통해 선배를 뽑아서 학문과 수박, 격검(擊劍), 사예(), 기마, 택견, 깨금질, 씨름 등 각종 기예(技藝)를 연마시키고 합숙하였는데 평시에는 환난 구제나 성곽축성 등을 하다가 전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삼아 자신을 희생하였다고 한다. 또한 선배는 검은 천의 옷을 입었다고 하여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고 불렀다.(검은 띠를 둘렀다고 함)

 

 

계백

백제는 솔개(, 보라매, 송골매, 참매)를 상징으로 하여 근구수왕, 동성대왕 때에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건너 산동, 북경, 절강성, 일본,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지배하였다고 한다. 또한 근초고왕이 일본의 왕에게 보냈다는 칠지도는 지금도 일본의 보물 1호로 남아있다. 이 모두가 칼이 가장 유용한 무기로 사용되었던 시대였으므로 백제의 검술이야말로 당대의 으뜸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검으로 지배한 시대였던 것이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오천의 군사로 김유신이 이끄는 오만의 신라군을 상대로 44승의 전공을 새웠지만 최후의 결전 직전 자신의 처자식의 목을 베고 전장으로 향한 진정한 무사(武士)였다. 당시 상황으로 백제군의 무술 실력을 가늠해 볼 때 고구려와 백제는 본시 마한의 후예국으로서 뛰어난 검법이 전해져 신라의 우상이었음에 틀림없는데 바로 예도(조선세법)가 삼한(三韓)으로부터 고구려, 백제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화(源花)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화랑으로 차세대를 육영하여 나라를 일으켰다.

<삼국사기> 신라 진흥대왕 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37(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만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여 같은 부류들끼리 모여서 놀도록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후에 그 중에서 우수한 자를 뽑아 쓰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쁜 여자두 명을 골랐는데 그중 하나는 남모(南毛)라 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준정(俊貞)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따르는 무리 3백 명을 모았는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그를 끌고 가서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그 일로 준정은 사형을 당했으며 그 무리들은 서로 화목하지 못하여 해산하고 말았다. 이로써 원화제도는 실패하였다.

그 후에 다시 얼굴이 예쁘게 생긴 남자를 택하여 곱게 단장시키고 그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이를 받들었다. 그러자 따르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도의로서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수를 찾아다니며 놀고 즐겼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이 올바른 사람인지 아닌 지를 알 수 있게 되어 그 중에서 선량한 자를 골라서 조정에 추천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이 쓴 <화랑세기>에는 현명한 재상(賢相)과 충성스런 신하(忠臣)들이 이로부터 그 두각을 나타냈고, 우수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화랑(花郞)

신라는 진흥왕 때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하여 국선(國仙)과 화랑(花郞)을 만들었다. 국선이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선인과 구별하기 위해 선인(仙人) 앞에 국()을 넣어 국선(國仙)이라고 했으며 고구려 선배가 검은 옷을 입은 단체로 조의(皁衣)라 했으므로 신라는 이와 차별된 꽃으로 장식을 하여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국선(國仙)()’자로 인하여 도교의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추구하고 산속에서 도()를 닦는다는 도인(道人)또는 선도(仙道)로 신선(神仙)이라 부르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며 전혀 다름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이는 유교, 불교, 노자를 합해 공부한 사람(仙人)도 아니다. 이 화랑제도는 인재 등용을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던 원화(源花)제도가 폐지되어 수년이 흐른 후 국가를 부흥하기 위해 다시 부활시켰는데 이때 다시 지은 이름이 풍월도(風月道)’ 화랑도(花郞徒)’라 했으며 우수한 가문 출신의 자제로 덕행이 있는 자를 선정하여 이전의 원화(源花)’제도에서 이름을 고쳐 화랑(花郞)’이라 하고 처음에는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은 것이 화랑과 국선의 시조이다.

화랑의 원류(源流)를 기록해놓은 선사(先史)는 곧 신라 이전 단군 이래 고구려, 백제까지의 유명한 선배들에 관해 기록한 것으로 고구려 본기에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의 도읍지다.(平壤者. 仙人王儉之宅)”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선배제도에서 깨금질이라는 말이 있는데 한 쪽 발로 뛰는 것으로 지금도 전라도 사투리에 이 말이 남아있으며 우리가 어렸을 때 자주 하던 닭싸움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