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판제 전 환경청장의 회고록-연재 19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나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쓴 『시지프의 신화』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욕한 시지프가 천벌을 받아 큰 바위덩이를 혼신의 힘을 다해 산비탈을 밀고 올라간다. 그 바위가 어떻게나 크고 무겁던지 조금만 힘을 빼도 그 바위에 깔려 죽을 지경이다. 그는 이 고된 천벌 끝에 정상에 닿았을 때 다 올라왔다는 행복감이 아니라 이제는 더 오를 곳이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행복은 오히려 산비탈을 밀고 오르던 그 고되고도 지겨운 작업 속에 있었다고 깨닫는다. 마치 운동회는 기다리는 때가 행복하지, 막상 운동회를 마친 그날 밤은 허탈감이 인다는 그런 심정과 통한다.
나는 이 시지프식 엄청난 부조리 사상을 그때 느꼈음에 틀림없다.
어떻든 이 합격소식을 어느 누구보다도 맨 먼저 알려야 할 곳이 있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내자한테였다. 부랴부랴 택시를 불러 타고 남가좌동 집으로 쏜살같이 달렸다.
‘참으로 기뻐할 거야. 내 시험 뒷바라지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결혼 전에는 내 사기와 건강을 위해 그 가파른 남한산성의 장경사엘 드나들었고, 결혼 후에는 신혼의 감격과 행복감이 채 고물도 묻기 전에 막을 내렸다. 실업자가 되어 기약도 없는 고시준비를 한답시고, 고등 룸펜이 되어 버린 나를 보고, 겉으론 일체 내색도 안 했지만, 내심의 그 고통이 오죽했을까. 신부로서 깨가 쏟아지는 아기자기한 맛도 잠깐이었으니, 친정 식구들과 주변 친구들에겐들 얼마나 자존심이 깎이고 면목이 없었을까. 그 모든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딘, 그 인고의 세월 끝이라, 이 합격으로 인한 보람 또한 그만큼 크지 않겠는가. 나의 고시 합격증은 그녀의 것이다. 암, 분명히 그것은 내 내자의 것이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택시는 이미 집에 당도했다. 집안으로 뛰어 들어서기가 무섭게, “합격했어!” 하고 내자에게 크게 소리쳤다. 그녀는 내 호들갑스런 소리를 듣고도 한동안 그저 얼얼해 서 있더니, 와락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며 울었다.
‘아니, 내 내자에게 이런 데도 있었나?’
사실 그러했다. 지금까지 50년,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아왔지만, 이같은 인간적인 기쁨과 감격의 원초적 표현은 그녀에게서부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말할 수 없었던 고뇌와 고통의 회오리 속에서, 합격의 기쁨이 함께 얽힌 뜨거운 폭발음이었으리라.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고시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이제는 더 물러설 데도 없다는 그 절박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내자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32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과 두 명의 시누이를 모두 가르치고 결혼시키면서 맏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였다. 직계로는 손자 5명, 손녀 5명 해서 10명의 손주와 박사를 6명이나 배출했고 미국서 공부하는 외손녀는 오바마 대통령상까지 수상하는 등 풍성한 집안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어주었으니 그 지혜로움과 헌신에 대한 감사를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내자는 어지간해서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주로 성질 급한 내가 소리 지르고 집을 나와 버리는 식이었다. 귀가할 때 혹 내자가 친정으로 가버리지나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며 들어가 보면 내자는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망이라도 가는 줄 알고 마음 졸였다”는 내 말에 내자는 “내가 좋아서 한 결혼인데 무슨 면목으로 친정에 가겠느냐”고 응답한다. 그녀는 내가 속 좁고, 같은 말 되풀이하고, 무례하게 마음대로 하는 성격이라며, 나에 대한 비난은 딱 세 마디였다. “밴댕이 콧구멍같은 소갈딱지”, “청개구리”, “비례물시非禮勿視”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있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남편이 의도적 실수나 장난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내자밖에 없다”는 것을. 내자는 그러면서도 항상 나를 신뢰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남편에 묵묵히 헌신해주었다.
젊었을 때는 멋 모르고 지났지만 50년을 같이한 지금 생각하면 “내자 이수자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다”는 것이 변함없는 확고한 신념이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때 행정고시의 재경직財經職 합격자는 모두 6명에 불과했는데, 그것은 행정법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 행정법 시험문제 중 하나가, 지방자치법 중에서 나왔다. 지방자치제가 아직 시행되고 있지 않아서 아마 대부분의 수험생이 이 분야에 대해선 소홀히 했으리라 믿어진다. 아무튼 그 합격으로 내 인생은 확실히 일대 전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그 옛날 장원급제자가 되어 어주御酒 삼배를 받고 어사화를 받던 그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오늘의 이 광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아픈 세월을 보냈던가! 용이 여의주를 얻은 기쁨이 이만큼이나 클까? 왕상王祥이 고빙叩氷하여 잉어를 얻고, 맹종孟宗이 읍죽泣竹하여 눈 속에서 죽순을 얻은 기쁨이 이보다도 컸을까?’
나는 옛날처럼, 삼일유가三日遊街를 하고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히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한 거나 진배없었다. 내자와 더불어 벽제의 속담을 의미 있게 되뇌었다.
임지를 떠날 때 선정善政 기념으로 주민이 여덟 필의 말을 바쳐 짐을 싣고 가게 했는데, 서울에 당도한 후 그 말이 낳은 새끼까지 되돌려준 고려 때의 승평昇平부사 최석崔碩 선생의 일화를 생각했다. 집이 헐어 방안에서 우산을 썼다는 황희 정승. 단양군수로 있을 때 형이 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상피相避를 한 퇴계 선생. 호조판서에 임명되자 집 수리를 중단한 이원익李元翼 선생과, 스승에게 노자路資를 드리려 했다가 호통을 맞은 이항복 선생, 은그릇 보낸 군수를 즉각 파면한 흥선 대원군을 생각했다.
이런 청백리들을 우러러보며 이 시책이 성공되기를 빌었다.
● 삼현육각 잡힌 고등고시 합격의 깃발-중에서
펴낸곳-나녹/511면/3만원/문의-02-395-1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