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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판제 전 환경청장의 회고록-연재 18

 

박판제 전 환경청장의 회고록-연재 18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

 

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기창의 스승인 비위를 서책이라 여기고 기창에 못지않은 열과 성으로 공부에만 전력을 투입했다. 수면도 두 세 시간밖에 취하지 않고 했는데 그때 일을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것을 견뎌냈느냐고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마침내 시험이 있는 4월이 왔다. 시인 엘리어트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이 4월이 꽃피는 화사한 4월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시험장으로 갔다. 온 가족 특히 내자의 그날 아침의 눈빛이 내게 큰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다. 워낙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나는 그 무언의 뜻을 눈빛에서 능히 읽을 수 있었다. 시험을 다 마치고 고사장을 떠나는 날, 하늘을 바라보며 후우 한숨을 내어쉬었다.

어깨가 착 까부러지며 맥이 탁 풀렸다. 이 시험을 위해서 기창처럼 뛰어온 고생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망하지는 않았다.

시험의 결과를 어느 정도 낙관할 수도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인사대천명! 이제 5월의 그 발표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확률은 반반이지만 두번 다시 낙방이란 어두운 골짜기를 생각하기 싫었다. 그럴수록 그 한 달이 너무나도 느릿느릿 황소걸음으로 느껴졌다. 한 달이란 시간은 어느 때나 정확한데도 사람에 따라선 그 한 달이 황소걸음이 되기도 하고, 쏜살같이 흐리기도 하는 법임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겐 그 한 달이 지겹도록 마냥 길기만 했다. 그 동안에 여러 번 꿈을 꾸었다. 어느 때는 돌아가신 이승만 박사와 비행선을 타고 안개가 자욱한 바다 위를 몇 바퀴 돌기도 했다. 어떤 때는 합격 통지서를 받기도 했고, 점수까지 꿈에 나타나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꿈은 그 사람의 잠재의식이 자고 있는 사이에 폭발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이 프로이드의 꿈 분석은 마음에 있으면 꿈에도 나타난다는 우리네 해석과도 맥을 같이한다.

즉 어떤 일을 골똘히 생각하느라 신경을 쓰게 되면 그 일이 곧잘 꿈에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프로이드적으로 그때의 내 꿈이 왜 그렇게 꾸어졌느냐를 살펴보면, 그만큼 내가 그때 시험 결과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5! 라일락이 향그러운 향기를 날리고 붓꽃이 다투어 피는 5월이 왔다. 계절의 여왕답게 일기는 이 땅에 화창한 날씨를 보여주었다. 발표 전날이 되었다. 꼭 송곳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불안과 초조가 전신의 신경 구석구석까지 곤두섰다.

견디다 못해 총무처 고시과에 찾아갔다. 원서 접수 때 낯이 익은 분에게 시험 당락을 미리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분은 나더러 복도에서 기다려보라고 했다. 퍽 고마운 친절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얼굴이 달아오르며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합격실패는 그 확률이 반반이지만 그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은 언도 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매우 긴장되었다. 입김을 불어넣는 고무풍선이 터지느냐 안 터지느냐 하는 그 한계점에 있는 듯한 그런 절대적인 순간이었다. 몇 분이 지났는지 몇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도 못한 채 다시 그분이 얼굴을 내밀 도어만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분이 문을 열고

나왔다. 나의 눈은 얼음 위에 넘어진 황소 눈처럼 화들짝 열렸다. 그 분은 웃으며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축하합니다. 합격입니다.

?

합격이라니까요.

이 소리를 확인하자 내 가슴은 터질 듯이 풀무질을 했다. 그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기가 무섭게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발부리가 어디에 닿는지조차 몰랐다.

, 드디어 해냈구나!

한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마다에 그 기쁨을 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큰소리로 합격이라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감격의 시간이 지나자 이상하리만큼 담담해졌다.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렸던 합격 소식이었건만, 만약 떨어졌다면 엄청난 절망이었을 테지만, 막상 합격되었다고 하니 기쁜 반면에 맥이 탁 풀리는 듯했다.

                                              ● 삼현육각 잡힌 고등고시 합격의 깃발-중에서

                                                          펴낸곳-나녹/511/3만원/문의-02-395-1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