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판제 전 환경청장의 회고록-연재 3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
펴낸곳-나녹/511면/3만원/문의-02-395-1598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3
우리 집안은 움도 싹도 없이 하루아침에 쑥밭이 되고 말았다. 많은 소송비를 무느라 농토는 수증기처럼 증발이 되고, 졸지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 시책은 이처럼 실제 집행과정에서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때 나는 열다섯살의 홍안紅顔 소년이었지만, 어른들의 말을 듣고 적잖이 분개했으며, 그 가난을 피부로 짓씹었다.
‘원수를 갚자.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판사나 검사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 되어 저 사람들의 논을 몽땅 사버리자.’
나는 이를 악물며 장래를 다짐했다. 더더욱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그렇게도 가고 싶던 중학을 갈 수가 없었다. 삼순구식三旬九食도 어려운 지경에 진학이란 언감생심 먼 나라의 배부른 이야기였다. 내 결심과 꿈이 이 소송으로 수포가 된다고 생각하니 실로 감내하기 어려운 정신적 충격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나는 지금도 철저하게 망해버린 그때의 우리 집안을 잊을 길이 없다. ‘소돔고모라’ 시市에 내린 유황 불비가 이보다 더했으랴?
폭군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을 때, 시민들의 비참이 이보다 더했으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1953년은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반공포로 27,000명이 6월 18일에 석방이 되던 해였다. 이보다 앞서 2월 15일에는 ‘긴급통화조치령’이 발표되어 우리 돈 ‘원圓’이 ‘환圜’으로 바뀌는 통화개혁이 있었다. 소송 패소로 우리는 조반석죽朝飯夕粥으로 근근히 연명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다 통화까지 개혁되어 우리는 땡전 한푼 구경할 수가 없었다. 식구들은 1년 열 두 달 고기 한 칼 못 얻어먹어 비린 것에 주려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들어앉아 구천勾踐이처럼 절치부심 섶에 자고 쓸개를 씹는 와신상담의 결의를 단단히 굳혔다.
중학 강의록을 받아 독학을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산밭골 재실齋室에서 권언부 선생님으로부터 한학漢學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때건 집안 형편이 풀리면 이 좌초에서 벗어나 도시로 나가 진학을 할 작정이었다. 그때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웠다. 매일 서너 줄씩 배우면 종일토록 그것을 읽어 암송하고, 몇 번이고 써 익히는 단순반복의 학습이었다. 나는 자랑이 아니라 선생이 두 번 가르치지 않아도 이를 잘 소화했다. 진도가 다른 학동들보다 빨라서 혹 선생이 볼 일이 있어 별강을 할 때는 내가 늘 선생 대신 대강代講을 했다.
그때 권 선생님은 새벽에 첫닭이 울면 벌써 일어나 재실 대청마루를 거닐면서 큰소리로 글을 외곤 하셨다. 그 소리가 아주 크고 청아해서 우리는 물론 동민도 다 깨어 일어났다. 다른 아이들은 농사짓느라 일어나기가 고되다 하였지만 나는 선생의 글 외는 소리를 들으면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껏 소리를 내어 따라 읽었다.
다른 아이들은 잠이 모자라 꿈벅꿈벅 졸면서 글을 외다 보니 잠이 들수록 그 외는 소리마저 차차 잦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흔들어 깨워준 일이 지금도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그때의 학습 방법은 주로 암송하는 것이었다. 현대 교육은 주입식이나 암기교육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이 암기교육이 큰 효과를 가져다 준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때 배웠던 명심보감의 몇 페이지에 무슨 글이 실려 있다는 것까지도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요즈음도 나는 곧잘 글을 쓸 때나 대화에서 그 유명한 글들을 수월하게 인용해 쓰곤 한다. 나
는 이 순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의 일화가 생각난다.
드골 대통령이 최고사령관인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기자회견을 할 때다. 기자들이 까다로운 질문을 하면 드골은 먼저 프랑스의 명시名詩를 눈을 감고 암송을 했단다. 그러면 기자들은 기가 죽어 더 이상 까다로운 질문을 못하고 어물쩍 넘어가거나 어쩌면 그렇게도 명시를 잘 외느냐고 물었단다.
“나는 어릴 때 우리 어머님이 늘 명시를 골라주면서 외게 하셨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교실 벽에 프랑스의 명시를 많이 써 붙여 놓고 그걸 외라고 했어요. 그때엔 그 뜻을 잘 몰랐지만 열심히 외었지요. 그러나 차차 장성하면서 그 시를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요즈음도 마음이 흥분되거나 당황할 땐 그때의 명시를 암송하지요. 그러면 대체로마음이 진정되거든요.”
이 대답에 기자들은 진한 박수와 찬사를 드골에게 보냈다.
그렇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 물론 수학이나 과학 같은 것은 수리적인 학과이므로 암기가 부적당하다. 그러나 어학이나 인문사회 과목은 이 암기교육을 무조건 배제하거나 타기唾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제1부 뼈를 깎는 배움의 뒤안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