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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물환경학회 40년 특집-이범호 고문의 학회 창립 이야기

길샘 2025. 1. 17. 14:22

한국물환경학회 40년 특집-이범호 고문의 학회 창립 이야기

 

부회장 10, 고문으로 30여년 동행한 이범호 고문

학회 초기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을 추천하여 영입

학회창립준비위원으로 아낌없이 경제적지원 도맡아

 

우리나라 한국물환경학회가 마흔살 불혹의 나이를 맞았다. (1985년 창립)

기후변화로 유난히도 단풍이 오랜동안 머물던 2411월 말 자택 근처 커피숍에서 학회 초기의 뒷 이야기를 풀어갔다

한국물환경학회의 역대 임원중 가장 고령이면서도 청춘을 즐기는 인물이 이범호(1934년생, 함남 북청군 출생, 서울대 토목공학/사진)고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내무부에 근무하다가 군 복무를 하였다.

전역 후 다시 내무부로 돌아가려 했지만 어수선한 정치적 혼란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당시 미림기술공단에 기술고문을 맡고 있던 최경렬(서울시 부시장역임, 2한강교 설계, 당시 최고의 기술설계자)고문밑에서 기술설계를 연마할 수 있는 미림기술공단에 부장으로 취업한다.

여기서 반세기도 뛰어 넘는 과거의 시대적 상황을 잠시 조명할 필요가 있다.

미림기술공단(대표 전세경)은 민간에서 창립한 기업으로 당시에는 상, 하수도분야에서 독보적인 최고의 기술설계 기업이다.

정부는 기술자립을 위한 일환으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설립과 외자와 이민정책을 아우르는 해외개발공사 설립을 위한 김종필 총리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운영하던 코리아 퍼시픽 콘설턴트를 흡수하고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를 설립(1965)하였으며 3년 후 미림기술공단을 인수 합병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후 미국 HDR엔지니어링회사의 주임기사(PM)로 연수과정을 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유상원조를 하기 시작했는데 역점적으로 지원하던 분야가 상, 하수도 분야였다. 한국의 기술자를 양성할 필요가 절실했던 미국(USAD)은 이범호 고문을 추천하여 기술연수를 하게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같은 해외연수사례는 이범호 고문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이며 전무후무하다

3년 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습득한 기술력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부장과 상하수도 기술이사 부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전방위적 활동을 한다,

바로 그 시기에 한국물환경학회를 설립하는데 중심 역할을 한다.

이범호고문은 한국물환경학회의 창립 준비위 시절 경제적 부담을 홀로 도맡아 해야 했으며 설립 후 부회장(1-5)과 고문(6-)을 현재까지 역임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임원급 원로로 생존하는 인물로는 이범호, 한상욱, 신응배, 조광명, 최의소 등이 있다.)

학회가 창립되던 1985년 당시 이범호 고문은 학회 설립 추진을 주도했던 교수들보다 (홍순우, 김원만, 권숙표등) 십 여살 아래인 50대 초반이었다.

학회 창립을 위해 부산했던 이범호, 홍순우, 김원만, 권숙표, 한상욱, 서윤수, 홍사욱, 조연제, 이범호, 최의소 고문들과는 아스라한 추억들이 소금처럼 녹아 있기에 대화의 실타래가 술술 풀려갔다.

문답식이 아니라 인터뷰 내용을 녹여 엮었다.

 

학회의 설립 필요성 소장파 교수들 열기 높아

좌로부터 김성표회장,최의소,이범호고문

 

학회의 근원적인 탄생적 배경은 한국의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미국, 일본등 해외 유학파들이 귀국한 70년대부터 시작된다.

7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WPCF(Water Pollution Control Federation )라는 단체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유럽을 중심으로 IWA((International Water Association)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WPCFWEF (Water Environment Federation)으로 확대 전환되었다.

이들 협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인물이 소장파 최의소 교수이다.

국내에서는 산업화이후 공해문제가 사회적으로 제기되었고 전두환정권 중반기에 와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목전에 둔 한국으로서는 상수도와 하천을 오염시키는 하수처리가 최대의 현안이였다.

박정희 시대에는 상수도를, 전두환 시절에는 하수도가 역점적인 정책 방향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구의정수장, 취수장, 댐건설 현장에 직접 참관하였고 전두환 대통령은 평화의댐 등 댐 건설현장에 주로 참석하였다.

이후에는 대통령들이 상하수도 관련 건설현장(,준공)에 방문한 적이 거의 없다. (대통령들이 상하수도분야에 참석한 사례만 비교해도 국가 주요정책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당시의 정부는 전문가들을 우대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경청했다.

하수처리 분야는 일본과의 협업이 활발했고 80년대에는 환경청(1980)이 설립되면서 정부가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국립환경과학원은 1978년 창립) 국내에서는 대한토목학회(1951년 창립)와 한국수도협회(1973-2001)등에서 120여명의 전문가들이 활동하였는데 토목학회 환경분과위원으로 최의소, 신응배, 조광명 교수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가장 진취적으로 미국단체와 소통하면서 물을 다루는 전문 집단을 조성한 소장파 인물로는 최의소 고문이다. (41년생, 황해도연백, 고려대학교 명예교수(69-2007), KOICA 캄보디아 자문관)

 

학자들의 지식이 간절했던 정부는 환경청 한상욱(39년생, 인천산, 제물포고, 성균관대, 홍사욱교수 제자 )수질국장이 수질보전학회라는 명칭으로 학회 설립을 독려했다.

한상욱국장은 수량관리를 하는 건설부와 수질관리만 하는 환경청의 한계점을 인지하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홍사덕 의원에게 언제까지 오염된 하천을 보면서 비만 오기를 기다릴 것인가, 환경청과 건설부의 수질과 수량을 통합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건설부를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건설부 상하수도담당은 곽결호 사무관(환경부 장관 역임)과 금인호 사무관(AID파견)이 담당하고 있었다.(물관리 일원화는 학회 태동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전국에서 환경분야 전문가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하는 등 국가 현안 사항을 학계와 연계한 인물이 한상욱 고문이다.

학회 설립을 위해 환경청 한상욱국장과 국립환경과학원의 서윤수 부장, 이범호 한국종합 부사장과 학계에서는 서울대 홍순우, 이범호 고문이 추천한 한양대 김원만교수, 연세대 권숙표 교수, 성균관대 홍사욱 교수, 고려대 최의소 교수등을 거점으로 학회태동을 준비해갔다.

아쉬운 것은 보건분야와 위생분야에서 활동하던 건국대 남상호 교수, 영남대 박영규 교수, 동아대 김수생 교수(폐기물학회 창립 주도)등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학문적 배경에는 미생물, 토목, 위생, 보건 등을 중심으로 학회의 골격을 형성했다.

회장의 선임은 연장자를 우선하되 토목, 약학, 보건, 미생물등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학자가 회장을 역임하는 방식으로 설정했다. 아울러 전임회장들이 후임회장을 선정하는 방식을 택해 다른 학회와 달리 초기부터 1회만 회장을 역임하는 정통을 구축하였다.(타 학회는 초대회장이 3.4차례 연임하는 관례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육 배경과 성장 과정이 다른 학자들의 모임에서는 합의가 잘 이뤄지지 못하여 조정역할을 하는 것도 술 한잔 곁들인 이범호 고문의 중요 역할이었다.

해외에서는 미국의 WPCF, 일본의 수질학회,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수질보전학회가 소통의 관계를 형성해 갔다.

 

국가와 국민에게 보탬이 되는 학회가 되자

 

물 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큰 대규모 정수장 건설, 댐 개발사업, 하수처리장 건설사업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부고속도로 사업과 매우 흡사했다.

이런 과정에서 정부는 학문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학회의 근본적 정신은 학문적 성과를 넘어 국민에게 유용한 자료를 제공해야 하며 학문적 자료를 재생하여 국민과 국가에 보탬이 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창립준비과정에서 학회명칭을 수질오염방지학회에서 수질보전학회로 변경하려 했으나 일본의 학회명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충돌되어 논란이 제기되었다,

원로급 인사인 홍순우 서울대교수, 김원만 한양대교수, 권숙표 연세대교수, 한상욱 환경청 실장과 엔지니어링업계에서는 이범호 부사장이 중심역할을 했다.(모든 회의의 식사비와 경비는 이범호 고문이 담당했다)

학회가 발족하면서 초대회장과 부회장등을 조각하면서 제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여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학회 창립준비위 과정에서 서열이 어렵게 배열되면서 초대회장에 거론된 인물은 홍순우 교수와 권숙표 교수였으나 환경청이 추천한 홍순우 교수가 초대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홍순우 교수는 서울대 미생물학을 전공한 1세대 학자)

서윤수 부장(국립환경과학원장 역임)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회 유치등 학회에 기여한 공로가 조명되었으며 권숙표 교수는 연세대 공해문제연구소장으로 청계천 정화등 활동경력이, 홍사욱 성균관대 교수는 환경청의 한상욱실장의 스승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도시공학을 전공하고 건설부, 엔지니어링에도 몸담은 김원만 한양대 교수와 엔지니어링에서는 이민우 한국종합기술공사 상무를 이범호 고문이 추천하여 2대부터 활동하게 하였지만 이민우 이사의 학회 활동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이범호 부사장은 창립 준비위원으로 임시의장(책임 간사)을 맡았다.

조각된 서열에 따라 차기 회장은 홍순우, 권숙표, 김원만 등으로 조각되었다.

초기 총무간사로 기록과 연락을 담당하며 수고해준 인물로는 국립환경과학원에 재직하고 있는 임연택 연구사였디.(2대부터 총무간사 역, 수질부장로 퇴임)

학회가 창립되었으나 기본적인 살림살이를 할 자금이 부족해서 당시 거금 500만원을 후원하여 학회의 윤활유 역할을 한 인물도 이범호 고문이다.

애초 짜여진 서열대로 하면 4대 회장에는 이범호 고문이 맡아야 했다.

그러나 환경청 한상욱실장의 스승인 홍사욱 교수가 적극 추천되면서 양보를 한다. 이범호 고문은 당연히 5대회장으로 내정되었으나 갑자기 위인선 교수가 등장한다.

위인선 5대 회장은 그 전 까지 학회에서 별반 활동한 경력이 없었으며 다만 4대 홍사욱 회장 시절 부회장을 맡은것이 전부이다.

 

권숙표 2대 회장은 정용 교수를 추천했고 한상욱 부회장은 홍사욱 교수를 추천하는 등 다양한 인물들이 학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3대 김원만 회장 시절에는 이사급 이상 임원진이 33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서윤수 6대 회장이 취임하면서 학회 활동에 미온적이거나 참여율이 낮은 인사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학회에서 배제 시켰다.

5대 임원(홍사욱회장)은 부회장 6, 이사는 23명이었으나 6대 임원(서윤수 회장)은 부회장 3(최의소, 하영칠, 한상욱), 이사는 13(정윤철, 유재소, 조연제, 류재근, 박영규, 신응배, 윤일병, 이민우, 이상은, 이홍근, 임연택, 정용, 조광명)으로 50% 이상 대폭 줄었다. 이같은 경향은 10대 임연택 회장까지 이어졌으나 11대 민경석 회장 시절 대폭적으로 증가했다.(부회장 5, 이사 43)

8대 조연제 회장 시절에는 물환경학회와 동반자며 선의적 경쟁 관계인 상하수도학회(수질보전학회보다 1년 후인 1986년 설립)에서 활동하던 김응호 교수가 총무이사를 맡았으며 9대와 10대까지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본향인 대한상하수도학회로 돌아가 회장을 역임했다.

김응호 교수의 물환경학회로의 편입은 9대 조연제 회장이 기술을 개발한 하수처리공법을 중점적으로 기술연구를 하던 포지형성균 우점화 하수고도처리연구를 학회지에 발표하고 국제학회에 발표하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대한상하수도학회에서는 김응호교수의 논문을 받지 않았던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김응호교수가 발표한 국제학회지의 등재는 관련 분야에서는 유일무이한 논문으로 최근(2022년 이후) 영국과 일본에서 많은 관심을 지닌 연구논문이다.)

 

, 하수도 한국산 설계의 지평을 연 이범호 고문

 

수돗물의 급수율 확보와 하수처리장 개선으로 깨끗한 하천을 조성하기 위해 학회와 엔지니어링업계가 주도해야 했고 학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졌다.

국내 최초로 우리나라 기술자의 손끝으로 서울시 선유정수장(태영건설,한국종합기술공사, 지금은 선유공원으로 전환)과 대구시의 강상정수장(12만톤)을 이범호 고문이 설계했다.

전국적으로 정수장과 하수처리장 건설이 집중되면서 학계와 정부는 상, 하수도 표준 설계집을 간행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소규모 정수장과 하수처리장은 표준도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전문학자도 없고 전문 기술자도 없는 상황에서 이범호 고문의 전문성은 우리나라 상, 하수도 설계의 표준이 되었다.

 

당시의 풍경을 이범호 고문은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는 기술적으로나 사회적, 경제적인 면에서 모두가 부족했다. 그래서 134역을 해야 했다. 그야말로 원맨쇼를 펼쳐야 했다.”고 회고한다.

1958년 이후 미국원조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정부는 자산재평가법을 제정하였고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입안하였다.

상수도시설의 복구사업은 1954년부터 FOAICA등의 원조에 의해 수행되고 있었다.

상수도용 기자재인 주철관, 강관, 시멘트, 철근, 펌프, 모터등도 원조를 받아 복구사업은 물론 시설확장과 신규공사를 실시해야 했다.(한국주철관 공업은 1953한국기계주물사로 설립, 시멘트는 1919년 평남에 일본 오노다 시멘트가 설립되었고 1942년 삼척공장, 1957년 문경에 대한양회가 창업됐다. 시멘트산업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962년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하면서 1964년 쌍용, 한일, 현대시멘트가 1966년 아세아시멘트, 1969년 성신양회가 창립되었다.)

학회가 태동하던 1985년 이후 정부의 주요 사업으로는 한강, 낙동강, 섬진강 하천정비 기본계획수립’, ‘환경보전 장기종합계획수립’, ‘중규모 다목적댐 예비 타당성조사사업’, ‘평화의댐 건설’, ‘수도권 광역상수도 제 4단계 사업등이 펼쳐졌다.

서울시에서는 구의정수장 확장공사, 암사정수장 건설, 영등포정수장 개량공사,

뚝도정수장 확장공사 및 취수장건설과 배수지 건설이 활발하게 펼쳐졌던 시기이다.

학회가 최초로 용역 수행을 한 것은 학회 설립 다음 해인 1986년 환경청이 발주한 <전국오염하천 정화를 위한 조사 연구>였으나 학회지 40년사 용역수행 현황에는 기록되지 않아 수정이 필요한 분야이다.(환경경영신문 기사예정)

 

과거를 돌아보고 물 환경의 오늘을 들여다 본다

 

<우리나라가 그래요. 세계적으로는 성공한 나라예요. 이만큼 윤택하게 물을 쓰고 하수처리가 이렇게 잘되고 있는 그야말로 성공한 나라입니다. 이제는 국제기구 미국 정부라든지 세계은행이라든지. 아시아 국제기구에서는 한국을 표본으로 삼아야 해요.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이나 유럽등 이런 데 가서 배울 게 별로 없어요. 저개발국 사람들이 배워야 되는 건 한국 같은 나라에서 배워야 해요. 7, 80년대 국제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인사들이 한국을 적극 추천 해줘서 한국의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들 공부하고 왔어요. 국제관계에서도 좋은 친구들이 많이 도와줘 그 가교역할을 내가 굉장히 많이 해줬어요. 지금도 국제적 교류가 학회에서 적극적이고 장기적으로 이뤄졌으면 해요.>라고 갈무리 한다.(한국물환경학회 40주년 행사에서 최의소 고문은 학회도 이제 해외로 눈을 돌리자고 건배사를 했다.)

 

*외부적으로는 한국수도신문’(1983년 창간)의 편집차장으로 활동한 김동환 박사가 학회 설립을 위해 권숙표박사와 김원만 교수를 도와 환경청을 비롯한 여론형성에 힘을 보탰다. 그 인연으로 박철휘교수는 김동환박사는 위로 20, 아래로 20년 소통이 가능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환경경영신문www.ionestop.kr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 소장, 환경경영학박사, 시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