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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샘의 이 한 장의 사진 2- 장발과 미니스커트단속

길샘 2022. 5. 23. 23:49

길샘의 이 한 장의 사진 2- 장발과 미니스커트단속

 

명동파출소에서 장발단속 서류작성,1973년
장발단속에 파출소에 끌려온 청춘들

 

장발단속

대학생이 된 병태와 영철은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참가비로 거금 2천원을 냈다. 흥분과 긴장속에 목욕재계하고 양복을 입고 미팅 장소로 가지만 그만 장발단속을 하는 경찰을 만나 줄행랑을 쳤지만 육교를 건너다 또다시 경찰과 마주친다. 결국 파출소로 붙잡혀왔지만 또 다시 도망을 치면서 영화바보들의 행진은 시작된다,

 

1971101일자 신문에는 가위질 스타트라는 제목 하에 퇴폐풍조 추방 운동의 하나로 장발족을 단속해 1,164명의 머리를 강제로 깎은 뒤 훈방했다고 기사가 실렸다. 이날 장발족 단속 기준은 머리카락이 귀를 덮고 뒤 머리카락이 여자의 단발머리보다 길어 불쾌감을 주는 경우이지만 ’40세 이상의 예술인들이 인습에 따라 기르는 머리카락은 제외한다고 했다.

 

유신체제에서 히피는 체제에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장발단속은 더 강화되었다. 단속의 명목은 장발이 퇴폐라는 것이었으며 19733월에는 경범죄 처벌법이 발효되면서 장발단속은 법제화되었다. 경범죄처벌법에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저해하거나 사회불안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사실을 왜곡·날조 유포한 자’, ‘은밀한 장소에서 무도교습행위를 한 자’, ‘거리에 침을 뱉거나 술주정을 부린 사람등을 단속 대상으로 추가하였다. 눈여겨 볼 대목은 성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장발을 한 남자, 저속한 옷차림을 하거나 장식물을 달고 다니는 자가 추가되어 장발단속이 합법화되었다. 장발단속은 국민의 주체의식을 확립하여 건전한 사회기풍을 정착하기 위해서라는 취지하에 지속적이고 강력하게 실시되었다.

1973년에는 12,000여 건이 단속되었고 19746월 장발족 무기한 단속에 나선 서울시경은 일주일 동안 10,103명을 단속했다.

홍콩의 액션배우 성룡이 1970년대 우리나라를 찾았다가 장발단속에 걸렸던 일화도 있다.

그러나 1980장발단속이 청소년들의 자율정신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내무부에서 단속을 중지시켰으며, 1988경범죄처벌법을 개정하면서 장발에 대한 단속 규정도 삭제하였다.

 

 

 

미니스커트 단속

 

한국에서는 가수 윤복희가 입은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지만 미니스커트는 당시 적령기 미혼 여성의 정장이 되어버렸다.

유신 정권이 들어서면서 장발과 함께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들은 풍기단속 등의 이유로 30cm 자를 가지고 다니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성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도 했다.

당시 단속 기준은 무릎 위 20cm에 걸리면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호황기에 미니스커트를 입는다는 치마의 길이로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환경경영신문 www.ionestop.kr 환경국제전략연구소장, 시인, 문화평론가 김동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