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샘 김동환의 역사속으로-세월호 와 서울시 한강유람선
세모 유병언에게 한강유람선 사업권 승인
세월호를 키운 원인자는 청와대와 서울시
한강에 세모 깃발 날리며 해운업에 승선
세월호 참사 5년을 맞은 지난 4월을 어렵게 떠나 보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되뇌고 싶지 않은 T,S,엘리엇의 시 황무지 제 1부 –죽은 자의 매장- 첫 연에 나오는 시로 4월을 매듭짓는다.
엘리엇이 시의 혼불을 한창 불사르던 24살 때인 1912년 4월 15일 총 승객 2206명중 1503명이 사망하고 703명이 구조된 타이타닉호는 그날 오전 2시 20분 영원히 수장되었다.
그리고 다시 102년이 지난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남쪽바다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3키로미터 앞 해상 맹골수로 에서는 국내 최대 유람선인 청해진해운소속 세월호가 제주도로 가는 도중 침몰되었다.
그동안 국내에서 발생된 대형 선박사고로는 53년 1월에는 창경호 침몰로 330명이 사망했고 70년 12월에는 남영호가 326명,87년 6월은 극동호가 27명,93년 10월에는 서해페리호가 292명, 그리고 94년 10월에 충주호가 30명의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후 20여년만의 대형 해양사고였다.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목숨을 잃었다.
세월호의 파장이 정치권을 비롯하여 국가 전체를 흔들었지만 재난안전의 근본적인 정비는 아직 안전하지 않다.
환경경영신문에 기사화 된 세월호의 뒷 이야기를 다시금 조명하면서 잘못된 정치적 판단은 결국 무수한 사람들에게 생명과 재산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조명하고자 한다.
스쿠아알렌 판매하던 기업이 해운업으로
세월호의 원초적 해운사업의 단초는 멀리도 아니고 대한민국 서울의 한강 유람선으로 시작된다.
한강은 -한강을 다시 살려야 한다-라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지시로 1982년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시작된다.
그리고 85년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은 한강개발을 마무리 하고 -한강사-를 편찬하면서 서문에-한강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시민들의 정열로 되어야 하며 한강을 보존코자하는 의지가 우리 시민들의 의무로 되어야 하며 그 정열과 의무에서 보람을 찾기 위해선 담당자들의 엄밀하고도 성의있는 노력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라고 적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강은 죽은 한강에서 살아있는 한강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이 청정수변에 유람선이 다닐 수 있는 뱃길이 트여 강변에는 유람선을 이용하는 승객이 타고 내릴 수 있는 11개소의 선착장 시설이 마련된다.
그 선착장의 위치는 옛날의 정취를 감지할 수 있도록 옛 나루터에 터를 잡고 그 주변에는 역사적 사적지들이 발굴 복원된다는 것이 당시의 사업계획이다.
유람선은 20에서 50톤급과 500에서 1천톤의 바지선을 한강에 띄워 승객운송과 더불어 화물운반으로도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전두환시절의 한강유람선, 그리고 이명박시절의 4대강과 아랏뱃길 사업과 유사하다.(아랏뱃길사업은 경제성이 없는 최악의 세금낭비 사업이다.)
그 유람선 주인공으로 당시의 세모 사장이며 세월호의 중심인물인 유병언씨가 있다.
서울시는 한강에 유람선을 띄운다는 사업계획아래 한강유람선운항업체 선정을 하게 된다.
85년 3월 언론에 사업공고를 내고 4월에는 10일 동안 참여기업들을 받게 된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기업으로는 선박제조 및 수리사업 전문회사로 10여년 이상의 정통을 지닌 코리아 타코사,(총자산규모 831억1천만원),선박제조전문회사인 대선조선(자산규모 202억원),라이프주택(3450억원),글로리 레저(73억원),전진실업(6400만원)선문그룹(신설기업),세모(25억 9천만원)원광(35억 5천만원)등이 참여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당초 1개사만을 선정한다는 사업방향을 2개사로 변경하고 ,사업자 선정 원칙을 총자산규모가 1백억원 이상이거나 10억원 이하의 기업은 제외한다는 기상천외한 애매모호한 심사기준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심의에 붙였지만 결과적으로 원광이 1위, 세모는 2위로 심사배점이 확정되자 서울시는 당초 1개사에서 2개사로 최종 선정하게 된다.
당시 세모는 유람선등 해운업에는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스쿠아 알렌등 주로 건강식품등을 종교적 세력을 통해 판매하던 기업이었다.
그 당시 한강을 책임지는 부서는 상하수국장으로 이후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장을 지낸바 있는 이기창씨가 실무책임을 맡았고 장인식치수과장이 실무를 담당했었다.
이후 91년경 대전지검은 오대양 수사사건을 발표하면서 한강유람선에 대하여 -세모의 한강유람선 운항허가 취득은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의 특별지시에 의한 특혜선정이었다고 발표한다.
당시 수사를 펼친 검찰은 염보현씨에 대한 수사도 병행 했으나 수사당시 염 시장이 미국에 채류하고 있어 직접조사를 못하고 지시배경이나 위법행위는 밝혀내지 못하고 만다.
한강유람선 사업전략을 세우게 한 당초 기획자는 사실 코리아 타코사였지만 결과는 세모로 사업권이 확정되는 그 뒷 배경에는 지금도 전두환 전대통령과 전경환 그리고 염보현과 유병언으로 이어져 오는 미심쩍은 관계가 아직도 의문점으로 남고 있다.
세모 유람선에 앉은 호랑이
아울러 애초에는 없는 심사규정중 10억원 이하와 100억원 이상의 기업이 배제된채 유람선 모형과 조형미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세모는 유람선 위에 한국의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 모형을 얹히자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제시한다.
서울시는 이같은 상징물을 좋은 점수로 평가하여 세모유람선의 조형을 공표한다.
당시 공보관실에서 실무를 맡았던 김모씨는 이에 대해 - 한강유람선에 호랑이 모형은 서울시 공무원과 언론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당시 유병언사장은 호랑이 상징물에 대해 적극적인 해설을 했다. 작은 키에 유창한 언변과 상대방을 직시하는 눈빛이며 상대를 포용하는 모습은 작은 나라 왕국의 왕자와도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서울시 발표가 있고 떡하니 호랑이가 걸터 앉은 세모유람선에 대해 언론과 시민들에게서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강에 백조나 기러기,황새등이라면 몰라도 산에서 사는 호랑이가 어떻게 물과 조형미를 갖출 수 있냐는 비아냥이었다.
서울시 출입기자들에게서도 좋은 호평을 받았던 호랑이 모형은 언론으로부터 정반대의 호된 질책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서울시와 한강유람선 관련 부서에는 괴편지들과 민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유병언씨의 관련 기업과 종교단체등에서 의도적으로 보낸 문서라고 추정은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호랑이 모형이 왜 나쁘냐는 질타성 반론들이었다.
그 결과 당시 이기창 국장(후에 서울시 상수도본부장 역임)은 염시장에게 호된 질타를 받기도 했다.
서울시장을 지낸 모씨는 어느 회고문에서 -서울시 기술자들은 자존심이 없어. 공사비가 1백억원이 든다고 주장하고서 값을 깍으라고 지시하면 결과적으로 반값도 안되게 시공할 수 있단 말야. 도깨비 방망이 같아. 얼마나 재미있어. 안되는 것은 죽어도 안되야지 말야-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의 아픔이 온국토를 토약질 시키는 과정에서 그 전신인 세모가 한강을 유람하게 한 근본 원인이 누구의 지시인지는 아직도 명확하게 결론지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심사기준이나 심사방식의 전환등 특혜로 인해 가당치도 않는 심사 규정마저 바꿔가며 세모를 한강에 승선시킨 원인자가 서울시라는것은 분명하다. 한강유람선을 단초로 해운업에 뛰어든 세모가 세월호를 운영하던 청해진해운의 전신이고 그 사주가 유병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환경국제전략연구소:김동환소장 )
*세월호 관련기사-환경경영신문:
15년4월19일/15.3.30/14.11.20/14.7.23/14.9.15/14.8.5/14,4.20/14.6.23/14.4.24/14.4.21/14.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