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유고시집-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유고시집-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바느질
박경리
눈이 온전했던 시절에는
짜투리 시간
특히 잠 안 오는 밤이면
돋보기 쓰고 바느질을 했다
여행도 별로이고
노는 것에도 무취미
쇼핑도 재미없고
결국 시간 따라 쌓이는 것은
글줄이나 실린 책이다
벼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1926년 10월 28일(경남 통영시 명정리 태생.박수영의 장녀(본명 박금이)
진주여고,수도여사대 가정과졸업,김행도씨와 결혼(46년) 딸 김영주 출생, 아들 김철수 출생. 4년만에 남편과 사별(50년).아들사망(56년)
황해도 연안여중 교사, 현대문학 단편 ‘계산’ 김동리에 추천,‘불신시대’로 현대문학신인상,장편 애가,표류도,김약국의 딸들,시장과전장(한국여류문학상),수필집 기다리는 불안,토지 현대문학에 연재(69년-94년/25년만에 탈고),환경문학계간지‘숨소리’창간(03년),2008년 5월5일 별세(82세) 금관문화훈장추서, 경남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미륵산 기슭에 안장.
#박경리선생을 떠 올리면 김지하시인이, 김지하의 오적을 읽으면 외손자를 업고 있는 박경리선생이 그려진다.
김시인이 옥중생활을 하던 살벌하기만 한 79년 원주에 칩거하던 박경리 선생을 만났다. 왕성하게 토지를 집필하던 시기이다.
마침 담장에 걸쳐 핀 장미꽃을 다듬고 있던 박경리선생도 놀라고 그 놀람에 나도 놀랐다.
살벌한 시국속에 원주에 낯선 이방인이 찾아왔기에 혹여 수사요원이나 감시요원이 따라오지 않았나 의심에 대한 반사신경이다.
거실로 올라가 잠시 차 한잔의 대화를 나누고 토지집필과정, 건강에 대한 잡담등 몇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어디에선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지 않나 두려움이 소통의 시간을 막았다.
박경리 선생도 시퍼렇게 날선 세상에서 똥배짱으로 원주를 찾은 나에 대해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너스레한 잡담만 가지치기 하듯 하면서 보낸 조마조마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38년이 지난 2017년의 여름. 통영 한산섬이 바라다 보이는 미륵산 기슭 양지녁에 묘비도 없는 무덤에서 다시 만났다.
박경리 선생은 나를 기억해 낼까.
-(중략)속박과 가난의 세월/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잔잔해진 눈으로 되돌아보는/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시 ‘산다는 것’중에서)
-물은 어떠한 불도 다 꺼 버리고/불은 어떠한 물도 다 말려 버린다/ 절대적 이 상극의 틈새에서/절대적인 이 상극으로 말미암아/생명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절묘한 질서인가.(중략)-(시 ‘모순’중에서)-- 길샘 김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