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연재-검법(검도)은 한국이 탄생시켰다-이국노의 실전 우리검도-5,거합도

길샘 2017. 5. 17. 02:18

연재-검법(검도)은 한국이 탄생시켰다-이국노의 실전 우리검도-5

 

 

 

거합도(居合道)

 

 

1621년 명나라에서 출간된 무비지(武備志)모원의(茅元儀)라는 장수가 세계 각국의 자료 2,400권을 참고삼아 쓴 병서이다. 이 책의 저자는 정리된 검법이 단 하나밖에 없고 그 검법은 호사가가 최근 조선에서 가져왔다고 하여 그 이름을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 했다. 이후 170년이 지난 후 정조 대왕의 명에 의해 무경이라고 하는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며 처음으로 조선세법의 원명 한국 이름이 예도(銳刀)라는 이름으로 밝혀져 쓰인다. 물론 기초적 검법 4세가 추가되어 24세에서 28세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왕명에 의한 역사기록이므로 절대로 거짓 기록이 될 수 없다. 양 책의 기록에도 일본의 검법이 기록되었지만 현재의 일본 거합도와는 차이가 많다. 일본의 거합도(居合道)는 그동안 많은 변천을 거쳐오면서 발전되고 우리의 조선세법 24()의 핵심을 나누어 인용하고 채택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거합(居合)의 정의

예도(조선세법)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르게 적을 빨리 베는 것으로 빠를 예() 자에 칼 도() 자를 사용했다. 그래서 빠른 칼이라는 뜻이 예도(銳刀)인 것이다. 거합도(居合道)도 역시 빠르게 칼을 뽑아 적을 베는 것이라고 한다. 이를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 “The swordsman quickly draws the sword from its sheath and simultaneously cuts the enemy.” 라고 하며 이 또한 한글이나 한문으로 바꾸어 쓴다면 똑같이 빠른 칼로 베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도나 거합도의 영문이름은 같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그 내용 또한 칼을 빼는 동작, 넣는 동작의 장식적인 것을 제외하고 본연의 베기 칼 동작은 유사한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베낀 것이라 생각되며 누가 보아도 아주 똑같다.

 

 

거합도(居合道)의 시조

그러면 일본의 고유 거합도(居合道)의 역사를 보자. 칼집에서 빼낸 칼을 사용해 적에 대응하는 기술을 검술이라고 한다면, 칼을 칼집에서 빼지 않은 상태에서 적에게 대처하는 기술을 거합도라고 하며, 거상(居相), 좌합(座合), 발도(拔刀), 발검(拔劍), 칼집 제거, 칼집 속 등 입합(立合)에 대항하는 단어로 집약되었다. 초창기는 거합과 검술이 구별되지 않았으나 여러 책에서 거합중흥시조라고 숭배되었던 하야시자키 진스케 시게노부가 그 선구자이다. 그는 오슈 사람이며 하야시자키가 묘진(明神)에게(원숭이) 깨달음을 얻어 도법을 묘사했고 이 사람이 중흥발도의 시조이다. 하야시자키가 기도를 하다가 도술의 깊은 비밀을 깨달았다는 사연은 다음과 같다.

1547년 하야시자키 진스케 시게노부의 부친인 카츠마는 어느 날 묘진의 신관이 있던 곳에 장기를 두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카미 슈젠의 기습공격으로 살해되었다. 이때 그는 민치마루(民治丸)라는 이름으로 5살 때이다. 아사노 카츠마가 어떤 이유로 슈젠의 원한을 샀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슈젠은 이후 행방을 감추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민치마루는 검술을 연마했고, 1554(13)에 검술을 수련하고자 신사에 들어가 구마노 묘진에서 기도하는 수행에 전력을 다한다. 2년 후(1556) 100일간의 신사수행에 영몽(신이나 부처님 등이 나타나는 신령스러운 꿈)을 꾸는 것이 신묘비술의 순수 발도를 할 수 있는 비결을 구마노 묘진의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민치마루(民治丸)’는 연구와 수련을 계속하여 1559년 마침내 그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나이 17세이다. 그후 2년이 지나서 그의 나이 19(1561)가 되어 교토에 있는 원수 사카미 슈젠을 찾아내 그를 죽이고 원한을 갚은 후 고향에 돌아와 신사에 고하고 자수하여 칼을 봉납한다. 그리고 이름을 민치마루(民治丸)’에서 하야시자키 진스케(林氏)’로 개명을 한 뒤 검술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거합도를 하야시자키류라고 칭했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도 한 두가지 있으나 거합도(居合道)의 시조는 하야시(林氏)의 이야기가 정설로 통한다.

 

 

거합도(居合道)의 발전

일본의 각 유파는 대표적으로 도사(土佐)의 오에 마사미치(天江正路)가 편찬하고 정정한 무소지키덴 에이신류(無雙直傳 英信流), 중흥거합시조라고 불리는 나카야마 하쿠도(中山博道)가 죽은 뒤 명명했다는 무소신덴류(夢想神傳流)호키류, 세키구치류, 야규세키슈사이의 신가케류(新陰流), 무가이류(無外流), 다미야류(田官流), 신도무넨류(神道 無念流)등이 있다.

현재의 전일본검도연맹에서는 12개 유파를 선정하여 칼을 자유롭게 빼고 넣을 수 없는 검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표 아래 칼 빼는 것을 가로, 세로로 한 쪽 어깨에서 다른 겨드랑이로 비스듬히 베어내리고 한번 친 칼을 재빨리 돌려 다른 쪽을 치며 정좌(正座) 3항목, 다레하찌(立膝, 한쪽 무릎은 세우고 앉는 자세) 1항목 그리고 다치와자(立業) 3항목을 합하여 7항목을 만들어 낸다. 이때(소화_昭和 445_1969)에 수십 회 회합을 거듭하여 전일본검도연맹거합이 제정되고 그 후 11년 뒤(소화_昭和 553_1980) 3항목을 추가하여 일본검도형()과 같이 10항목이 되어 전검련(全日本劍道聯盟) 지정기술로 발전되었다. 또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다른 유파의 검술을 전검련 지정기술과 함께 한 자리에서 병행하고 또한 단 심사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일본의 거합술(居合術)은 대단히 미래지향적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큰 의미를 주고 있다.

 

검술의 명인

6363승을 했다는 일본의 전설적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가 쓴 오륜서도 그가 세상을 뜨고 나서 100년 뒤 1745도요다(62)’가 기록으로 남겼다면 사실과는 다소 과장될 수 있다고 보지만 그래도 믿어야 한다. 역사는 지금 자신의 생각으로 폄하하거나 와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검성이라 부르는 쓰가하라 보쿠텐(1489~1571) 일지태도(一之太刀)라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베는 단순 초식의 일격필살 검법으로 19회의 진검 승부와 37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일본 최대의 고류 검술 유파 신가케류(新陰流)의 창시자 가이즈미 이세노가미 노부즈나우에스키 겐신가문의 창술 사범을 지내고, 평생을 유람 검객으로 살았으며 또한 다께다 신겐의 부름도 거절하고 신가케류(新陰流)를 만들었다고 한다. 죽도록 수련하여 실력향상은 물론 초급, 상급, 면허소지(멘교가이텐)를 구분하는 승단제도는 현재의 수련체제를 초시한 것이다.

 

하야시자키류(林崎流)는 칼을 뽑는 동작과 공격을 하나로 합친 발도술을 처음 시작한다. 묘한 것은 하야시자키 진스케가 만든 칼의 칼자루가 일반 칼보다 상당히 길게 만들어 칼을 뽑아 베기 동작시 거리가 늘어나기 때문에 가공할 위력이 칼끝에 있게끔 개발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검도의 수련이 바로 장비를 개발했다는 점에 우리에게 지금도 무엇인가 생각할 것을 남겨준다. 따라서 기술과 장비는 같이 중요한 승리의 자본이 되는 것이다.

 

책이 아니고 도장도 아닌 곳에 단 한 명의 후계자에게만 구전으로 이어지는 일본 고류(古流)의 검도를 보고 옛날 우리나라 검법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