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검법(검도)은 한국이 탄생시켰다-이국노의 실전 우리검도-3
연재-검법(검도)은 한국이 탄생시켰다-이국노의 실전 우리검도-3
예도(조선세법)는 신(神)의 나라 삼한(三韓)부터 시작
진흥왕과 금계독립(金鷄獨立)
신라의 진흥왕(24대)은 화랑을 처음 만들고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정하여 신라의 자주독립과 삼국통일을 염원하였다. 즉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과 견줄만한 자국의 영토확장을 실현한 왕이다.
화랑의 시작은 진흥왕 원년(7세)에 모친인 「지소태후」에 의해 문무에 빼어난 인재의 등용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를 등용한 것으로 〈화랑세기〉, 〈삼국사절요〉, 〈동국통감〉에 기록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화랑의 설치가 진흥왕 37년(576)으로 기록된 것은 문제가 많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거칠부」를 총사령관으로 551년에 신라군이 출정하여 고구려의 10개 군, 백제의 6개 군을 빼앗고 북한산, 창령, 마운령, 황초령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워 그를 태왕(太王)으로 제국의 황제라 칭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진흥왕 부친의 이름이 김입종(金立宗)으로 금계독립(金鷄獨立)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겉으로는 부친의 이름을 추켜올려 왕권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왕들의 정책과 다를 바 없지만 그 속에는 고도의 군사전략이 숨어 있는 것이다. 즉 금계독립을 내세워 왕권의 정립을 넘어서서 신라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지향하는 의도로 보여진다.
또한 진흥왕은 법흥왕이 제정한 연호 건원(建元)을 개국(開國)으로 고쳐 자신이 결코 약소국인 신라의 왕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장차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겠다는 뜻을 밝혀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영토 확장의 의지를 천명한다.
따라서 그의 부친 김입종(金立宗)을 국가적 차원의 명칭으로 바꾸어 호칭한 것이 「금계독립(金鷄獨立)」으로 표출되는데 이는 신라의 자주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풀이된다.
그후 진흥왕 재위 29년(568)에는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하였고, 33년(572)에는 홍제(弘濟)로 하여 보다 큰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하여 진흥왕은 화랑을 본국검으로 단련하여 금계독립세를 내세워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솟대
예도(조선세법)의 근본은 신(神)의 나라 삼한(三韓)에서부터 시작된다. 삼한은 삼국시대 이전 마한, 진한, 변한으로 마한은 고구려, 백제의 모든 지역의 큰 영토를 지배했고, 변한은 가야(진주, 고성, 김해) 지역과 진한은 계림국(성주, 경주 등) 지역으로 소국에 불과했다. 삼한은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삼신설(三神說)에 의한 신앙인들로 구성되었으며 많은 신(神)을 가진 부국이었다.
소도(蘇塗)
특히 마한의 여러 나라에는 별읍(別邑)이 있었는데 이를 소도(蘇塗)라고 한다. 그 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학자에 따라서 소도가 지역의 경계표시(장승) 또는 성황당이라고도 하지만 당시에는 신전(神殿)으로 각처에 산재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인간이 천신에게 기구하는 기원의 통로 또는 신의 계시와 신탁이 전수되는 신로(神路)나 신이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 신전을 수호하는 솟대(솓대, 솥대)가 있는데 긴 나무 약 3~5m 꼭대기에 앞을 보도록 1m 내외의 막대를 수평으로 또는 앞이 약간 낮게 수십 개를 꽂아 신과 신전을 수호하는 신으로 모셨다. 또한 앞자리 끝에 ‘매’ 등의 새부리와 머리를 조각하여 붙여 위엄을 더하게 했다. 훗날 이 새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상징인 국조가 되었다.
이 솟대(솓대, 솔대, 소줏대, 별신대)는 삼한(三韓)시대부터 신을 모시는 장소인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곳에 세우는 입목(立木)이다. 소도라는 말도 같은 유래에서 나온 말이다. 또한 사이후생(死而後生) 죽은 사람도 다시 깨어나도록 한다는 말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이다. 솟대는 장승 뒤에 벽처럼 둘러싸여 세워졌는데 이를 기점으로 사방 주요 고을과 거리를 표시했다고 하며, 민중신앙으로 전해지고 마을 입구에 이정표, 서낭당, 칠성당과 천하 대장군, 지하 여장군으로 세워진 장승 뒤에 솟대를 높이 세워서 마을과 신을 보호해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였다.
솟대는 긴 장대 끝에 작은 나무토막을 수평으로 뉘어 놓기도 하고 나무 끝에 새 모양의 머리와 주둥이를 달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서는 백성들이 아들을 낳거나 과거급제 등의 축하를 할 때도 솟대를 세웠다고 하며 매의 형상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높게 나는 수호신이며, 높은 곳에 있는 수호신임에 틀림없다. 솟대 밭에 잘못 들어가면 귀신도 못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특히 백제에서 솟대에 ‘솔개’를 달아 놓은 것이 삼국통일 후 ‘오리’, ‘비둘기’로 변형되었는데 이것은 백제의 국조인 ‘솔개’를 없애려는 신라의 정책으로 패전국 백제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높이 세운 솟대는 지역에 따라서 솟대(황해도, 평안도), 솔대, 수살대(함흥지방, 강원도), 소주, 소줏대(전라도), 짐대(강원도), 별신대(경상도 해안지방)를 비롯하여 신간(神竿), 풍간(風竿), 장간(長竿), 화표(華表_柱) 등으로도 불리었다고 한다. 이 신전의 솟대 끝에 표출된 새는 영매로서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진 신간으로 천신(天神)과 조신(鳥神)을 의미하며 종교적 심상이었다. 이는 신전을 외부로부터 지키는 의미도 있다. 마치 불교 사찰에 들어가는 문 앞의 사천왕도 이와 비슷한 의미이다. 이것이 진화되어 홍살문에 있는 매의 날개 비상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변형된 것이 일본의 신사 입구에 세워진 개(開)자 모양의 문(도리이, 鳥居)이다. 이것은 마치 칼 두 자루를 걸쳐 놓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 또한 솟대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문화의 신은 태양에서 신(神)이 비롯되어 새(烏)로 이어지는데 이는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태양조인 삼족오(三足烏), 신라는 금계(金鷄), 백제는 솔개(매)를 국조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스의 두 얼굴 야누스 신은 성과 집을 지키는 신(神)으로 시작을 알린다고 하여 야누스(Janus, 神)를 신으로 부르며 오늘날 달력의 1월이 제뉴어리(January)가 되었다고 한다.
거정세(擧鼎勢)·상단세
검법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동물들의 생존경쟁에서 취하는 우월한 동작을 따서 인용했으며 사용하는 글자의 모양과 생활 습성에서의 조형물 그리고 상상의 신(神)적 물체에서 유추했다고 본다. 따라서 그것이 현재 언어로 발전하여 습관적 행동과 예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솟대는 머리 위에 칼을 들고 위용을 자랑하며 공포감을 주는 검법의 대적세 중의 하나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정격(擧鼎格_勢)이라고 유추할 수 있으며 현대 검도 「상단세」이다. 즉 신전의 수호신 솟대의 위풍당당한 형상에서 「거정세」가 나오고 또한 솔개가 날개를 높이 들어 비상하며 홰를 치는 모습에서 「태아도타세」가 자연스럽게 표현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을 선조들이 검법의 첫 단락으로 채택한 지혜는 참으로 위대한 선인의 경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에 신전의 용어 신물에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通志)〉에 기록된 「예도(조선세법)」의 태아도타세, 양각조천세, 여선참사세, 금강보운세의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더욱이 「태아도타세」의 높은 기세와 「거정격」은 나머지 27세(勢, 또는 23세)를 당당히 시작하고 수호하는 자세이다.
솟대(솔대, 솓대) 거정세, 정대, 상단세는 시대적으로 다르게 부른 높은 자세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즉 이 솟대가 예도(조선세법), 본국검의 원초석인 것이다. (환경경영신문 편집부)
*전통 검법의 바른 원리 실전 검도 이야기
이국노 8단의 역작- 실전 우리 검도-
510면/전체 칼라/도서출판 직지/6만5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