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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호 전환경부차관의 자전적 –공직심서-연재 14-기록하는 습관

길샘 2017. 4. 10. 10:10

문정호 전환경부차관의 자전적 공직심서-연재 14

 

 

기록하고 인계하라

 

1962년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들이 14세 소년 73명을 대상으로 부모에 대한 느낌, 훈육 방법, 가정환경, 성 정체성 등에 대해 심도 있게 인터뷰했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후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아 10대 시절을 기억하게 했는데, 놀랍게도 그 결과는 34년 전의 기록과 일치되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 우리가 지금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기억 중 대부분은 '진정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해서 기억하는 경향이 있고, 인간의 뇌는 남겨 놓고 싶은 것만 구미에 맞게 저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엇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기록해 두려고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기록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더욱이 젊은 사람일수록,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자기의 기억력을 과신한 탓에 기록하는 것을 오히려 귀찮게 생각하고 흔히 게을리 한다. 그러나 정부 업무에 있어서 기록이라는 것의 중요성은 개인의 기억력과 관계없이 정책의 일관성, 계속성이라는 차원에서 참으로 중요하다. 정부 공문서의 형식을 취하든 비공식적으로 업무추진 일지라는 형식을 취하든 기록의 형식과는 별도로 기록은 중요하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최종적인 업무처리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공문서보다는 그 업무를 담당했던 공무원들이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메모형식으로 또는 일지형식으로 기록해두었던 내용들이 더 필요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는 정책결정에 관한 결과만 남아있고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필자 스스로도 기록의 필요성은 인식하면서도 습관화되어 있지 않다 보니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놓은 것이 별로 없어 뒤늦게 크게 후회하고 있다. 30년의 공직생활 중 담당했던 업무들에 관해 그때그때 중요한 사안들을 기록해놓았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자료가 되었을까. 그러한 자료들이 남아있다면 후배 공무원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나 자신 공직에서 나와 인생을 회고하면서 글을 쓰는데도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하나의 정책이 어떠한 배경에 의해 시작되었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어떤 내용이 무슨 이유로 변경되었는지 등에 대한 기록이 없다보니 시간이 흐르고 담당자가 바뀌면 원래 정책이 의도했던 취지나 목적이 변질되거나 왜곡되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거나 담당자가 바뀌더라도 정책이 당초 의도했던 취지대로 시종일관 추진되고, 일관성과 계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서상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물 외에 정책결정과정 또는 집행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들이 가급적 많이 기록되고, 유지되고, 인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한 기록들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정책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기록의 중요성은 정책의 일관성, 계속성 유지라는 측면 외에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외교협상 테이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협상 테이블에 앉는 담당자가 수시로 변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필자도 직접 경험한 바 있지만, UN과 같은 국제무대에서 선진국 대표들의 발언을 들어보면 어느 나라의 누가, 언제, 어떤 말을 했는지를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하며 논변을 전개한다. 근거를 바탕으로 한 발언은 힘이 실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참가자들로부터 호응을 이끌어내기가 쉽다. 양자 회의에서 협상을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상대방 국가에서는 협상 참여자가 고정되어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협상 대표가 수시로 바뀌는데다 더욱 문제인 것은 상대방은 우리 측의 과거 발언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상대국의 발언기록은 물론 우리 측이 발언한 기록도 갖고 있지 못한 탓에 상대방이 하는 말의 진위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국가의 이익을 다루는 협상장에서 그간에 논의했던 공식적인 내용들은 통상 기록으로 남겨 상호 확인하는 절차를 갖지만, 논의가 진행 중인 사항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것들도 많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것들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각자가 기록을 남겨 협상 참여자가 바뀌더라도 인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국익에 엄청난 피해를 끼칠 수 있다.

 

기록은 정책수립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통계이다. 통계도 과거에 대한 기록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통계와 같은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하지 않은 정책이나 사업은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 문제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으면 통계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조사방법론의 발달로 통계의 정확성, 신뢰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 기본이 되는 기록의 정확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통계의 정확성 또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인구에 대한 전국단위 통계자료는 있는데 그 기초가 되는 시·군 단위 통계가 없거나 읍·면단위 통계가 없다면 전국 인구통계는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문제는 아직도 이런 통계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숫자가 되었든 문자가 되었든 자기가 맡고 있는 업무와 관련한 사항들을 잘 정리하고 기록하여 인계·인수하는 절차가 공직사회에 확고히 자리 잡아야 한다. 요즘은 여러 가지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이러한 일들을 매우 편리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맡고 있는 업무 프로세스와 실적까지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관심부족과 기록·관리에 대한 공무원들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기록과 제대로 된 업무 인수·인계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유능한 공무원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의 업무 개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기록·관리에 힘써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