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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판제 전 환경청장의 회고록-연재 16

길샘 2017. 1. 17. 01:44

박판제 전 환경청장의 회고록-연재 16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

 

나도 모르게 이마에 배인 마른 땀을 닦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시 그를 땅에다 내려놓고 철길 터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온통 나에게로 무너진 그의 체중은 천근도 더 되는 듯했다. 바로 이때였다. 앞쪽 터널에서 별안간 기적소리를 내며 산더미만한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밀쳐 옆 언덕바지에 붙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다시 한번 기적을 울리며 우리 곁을 지나갔다. 철교를 건넌 지 불과 2, 3분 차이였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둘은 만약 그 철교 위에서 그 기차를 만났으면 영락없이 그날 밤 황천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의 조상 음덕인지 그 사원의 조상 음덕인지는 몰라도 결정적인 대참사를 기적적으로 모면했다.

지금도 나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 70평생을 되돌아보면, 거의 10년 주기로 속설에 부처님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삼재수가 들고, 신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66년과 1967년 사이에 그 삼재수가 예외 없이 찾아와 괴롭혔고 내 신상에도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19664월 군에서 제대했지만 행정고시에 실패했고, 9월엔 아버지가 타계하셨다. 그런가 하면 11월엔 내가 100년을 해로할 내자와 결혼했고, 유니온셀로판회사에 입사했으나 야반에 철교 위에서 이 같은 위험한 광댓줄을 탔다. 나중에 그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그 다음해인 19675월에 대망의 고등고시에 합격하였고, 9월에는 재무부에 발령이 나 난생 처음으로 국록을 먹게 되었다.

1967년의 새해가 밝았다. 이해엔 322일에 간첩 이수근이 탈출하려다가 체포되었고, 78일엔 동백림 거점 대남 공작단 사건이 일어났다. 내 나이 스물아홉이 되던 해이기도 하다. 2월로 접어들자,고등고시의 시행요강이 공고되었다. 그 공고를 보니 4월에 시험이 있고 5월에 발표가 있다는 것이었다. 신문지상에 발표된 이 공고를 보자 몹시 가슴이 뛰었다. 전신에 열기가 화끈 덮쳐왔다. 작년에 응시했다가 낙방의 고배를 마신 끝이라 일말의 흥분이 스멀스멀 살갗을 딛고 달음질쳤다. 그와 동시에, 실패는 한 번만으로 족하다는 강렬한 각오가 내 가슴 밑바닥에서 용솟았다. 더욱이 아버지가 작고하고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 한 가장으로서 아니, 우리 집안의 종손이요, 호주로서 당당히 급제하여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혀야 한다고 마음의 무장을 단단히 했다.

나는 모처럼 얻은 유니온셀로판회사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윗사람이나 동료들이 내 이 돌연한 사표에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서 만류했다. 나는 분연히 떨치고 그곳을 떠났다. 잔 인정에 발목이 묶여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면 내 인생은 영영 발전이 없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을 보장해줄 호재는 다른 사람 아닌 내 자신이 스스로 개척해야 된다는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

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해 우선 몸을 움츠리고, 호랑이는 작은 토끼를 잡는 데도 혼신의 힘을 다한다. 망설이지 말고 이곳을 떠나자.다시 직장에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 되었다. 그래야만 고시준비에 전력투구가 될 것 같았다. 그날부터 신혼의 감미로운 신방을 과감하게 떠나 아버지의 빈소방殯所房에서 거처하기로 했다.

2부 봉정만리의 여권을 쥐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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