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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소녀상과 독일 유태인 수용소

길샘 2017. 1. 17. 01:13

위안부 소녀상과 독일 유태인 수용소

소녀상 눈물도 닦아주지 못하는 일본

유태인수용소는 참회의 교육현장으로

 

요즘도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두고 한,일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소녀상은 김운성, 김서경 부부 작가가 공동작업을 통해 만든 작품으로, 단발머리의 한복 차림을 한 소녀가 흘러가는 세월을 움켜지고 그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이다.

추모비나 기념비 대신 소녀상과 같은 예술작품을 세우자고 제안한 이는 일본대사관이 위치하고 있는 종로구의 구청장이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구청장 당선 이전 26년간 건축가로 일한 경험을 토대로 비석에 대한 허가는 힘들지만 예술 작품으로 분류하면 법적인 문제를 피할 수 있다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조언했다.
검정 단발머리의 하얀 저고리, 검정치마, 나무 걸상과 빈 의자, 15도로 치켜뜨며 앞쪽(대사관이던, 동해바다 일본영토이던)을 응시하는 소녀상의 기본 컨셉트. 일본의 참된 반성을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주제를 '기다림'으로 했다. 소녀상은 우리나라와 미국등 60여곳에 앉아있지만 여전히 맹추위속에 가슴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있다.
새해만 되면 일본 아베총리를 비롯하여 각료들이 전범들의 공동묘지이기도 한 위패를 모신 야수쿠니 신사를 찾고 있어 우리나라와 중국은 영 속이 쓰리다.

1백억원의 위로금으로 한,일간의 맺힌 한을 눈 녹듯이 녹아내릴 수 있다는 논리의 일본.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은 패전시절보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참회와 반성보다는 갖가지 재평가를 통해 한국은 일본에 의해 문화와 경제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쟁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자기입장에 맞도록 억지를 부리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천국이 일본이다.

미래로 정진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과거를 잊고 세계 각국과 친교와 협상을 통해 경제는 물론 자원의 확보와 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일제시대의 잔혹성과 위안부 및 일본에 광부로 끌려가 이름도 없이 죽어간 우리의 조상들에 대한 그들의 만행은 마땅히 참회해야 하고 우리는 그들의 진정한 참회를 통해서만 용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현실은 심각할 정도로 세계적인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좋게 꾸미는 작태속에 경제적 수단으로 일제시대의 잔혹성을 덮어가려는 교언영색,(巧言令色)에 국민적 감정은 풀리지 않는다.



이런 가슴 아프고도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안고 독일로 향했다.

뮌헨시에서 40여분간 달리면 유태인 최초의 수용소인 다하우(DACHAU CONCENTRATION CAMP)수용소가 있다.

유태인 수용소는 독일에 아우슈비츠,다하우,부헨발트,작센하우젠,폴란드의 트레블링카,네덜란드 웨스터보크나,프랑스의 드랑시등 독일과 유럽전역에 2만개의 수용소가 건설되었지만 다하우는 최초로 설립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택시를 타고 수용소로 가는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마스 케닐리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인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장면을 떠 올린다.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유태인의 생활상은 보여주지 않지만 냉혹하고 잔혹했던 학살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 군인들이 유태인을 거리낌 없이 죽이는 장면들은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게 묘사되었다. 유태인 마을을 소탕하는 장면에서는 바흐의 음악이 흐른다. 바로크 시대에 만들어진 바흐의 곡은 냉기 어리게 연주되어 학살 장면을 몸서리치게 부각하고 있다.

패망한 독일을 떠나 스스로도 도망가야 하는 그 순간까지도 아이슈비치 독가스실로 끌려간 유태인을 구하기 위해 남은 재산을 뇌물로 바치고 자동차를 팔면 두명을,히틀러의 상징 뺏지를 팔면 한명을 더 살릴 수 있었다며 자괴적 눈물을 흘리는 오스카 쉰들러의 눈물은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쉰들러의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금 스스로를 반성하게 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장면 장면들을 연상하면서 어느덧 자동차는 다하우 수용소에 멈췄다. 장송곡처럼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검은 철문에는 굳건하게 조형된 노동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Arbit macht frei)-라는 글귀가 또 한번 가슴을 친다.



아침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 비가 내리는 데에도 독일의 많은 학생들이 견학을 왔다. 초등생부터 중,고생, 혹은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아이들도 눈에 보인다.

몇 차례 독일을 다녀 갔지만 수용소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쓸쓸하게만 그저 몇몇 노인들이 찾아오리라 생각했던 수용소는 학교라도 온 듯 학생들로 붐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비를 맞으며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아침 일찍부터 이곳을 찾아 안내원의 해설을 듣고 있다. 그들의 낯빛이 심각할 정도로 진지하다.

많은 독일 박물관들이 유료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곳만은 무료로 운영된다는 설명에 개인적 탐욕속에 정치를 휘두른 미래재단, 육영재단이며 각종 국내 문화재단들의 운영방식이 크로즙된다.

뮌헨 환경전시회를 관람하며 전시장을 돌고 돌아 다음날 찾은 길이라 피로도가 높았지만 수용소 정문을 들어서면서는 숙연함 속에 그냥 역사속으로, 아니 영화속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34개의 수용시설 중 양쪽에 각 1개의 수용시설만 그대로 보존 참관자들을 맞이하고 나머지 32개는 패쇄하여 넓은 광장으로 당시의 상황을 연출시키고 있다.

다하우 수용소는 유태인수용소로는 최초로 1933년에 설립되었지만 우리가 흔히 영화속에 본 아이슈비치 수용소보다는 규모가 작은 곳으로 패쇄된 45년까지 모두 28만명이 이곳에 수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태인수용소로도 최초로 설립되었지만 최초로 시체를 화장하는 화장장시설과 전쟁말기에 설치한 가스실도 가장 먼저 설치되어 시범 운영되었고 이 방법이 그대로 타 수용소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설계된 것이라 그 의미가 남다르다.

수용시설에는 3층으로 이뤄진 나무침대에 수세식화장실과 세면대가 별도의 방에 설치되어 공동으로 활용했다

독일의 SS대원이 상주하던 공간을 비롯하여 인체의학 연구실,고문실,가스실,취조실등은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생체실험현장은 전기(감압기)를 이용한 고지열실험,말라리아등 결핵실험,,신약검사실험,폐놀가스의 독성여부실험,심장 정지후 재박동실험, 저체온증 실험,색전증실험,바닷물을 음복하게 한 실험, 고름 주사후의 질병실험, 페니실린 효과 확증실험등 다양한 의학실험으로 오늘날 독일을 의학강국으로 재탄생시킨 생체실험 현장이다.

생체실험현장의 각종 문서와 편지등에는 히틀러의 연설문과 이곳에서 생체실험에 참여했던 의사가 수용소장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가 눈에 박힌다.

 

-인체실험을 반대하고 용감한 독일군을 죽게하는 사람은 반역자나 다름없다(하인리히 히틀러의 연설문중)-

-동서고금을 통해 의사로서 내 손으로 인체의 실험연구를 하게 한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나치시대 독일의사가 수용소장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

 

가스실은 아래 바닥과 천장에서 가스가 분출되게 설계되어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설치되어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전쟁말기 식량부족과 이와 벼룩등 각종 질병에 병들어 가는 죄수들을 관리하기 어렵게 되고 사망자가 속출하자 가스실을 도입하였다.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에 이들 죄수들에게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소독을 해야 한다면서 유인했다고 한다.

유대인수용소 가스실 초입에 있는 비좁은 소독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스실의 탄생에 대해 국제적십자사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가스실의 설치는 연합군이 과도하게 식량보급을 차단 독일군의 패망을 부추긴 장점도 있지만 수용자들의 식량마저 차단하여 최소한의 생명 유지선을 지킬 수 없게 되어 탄생된 참혹한 현장이라는 연구보고서도 관심을 모았다.

죄수복에 별처럼 달린 유대인 상징마크는 당시 죄인들의 성분을 분류한 20여종의 상징마크를 구별하여 가슴에 달게 하였다.

일테면 유태인중에 탈주범,교수나 선동분자, 2회이상 수용된 중범등과 각국에서 붙잡혀 온 사상범,게이등 동성연애자들,깡패류등은 유대교의 상징인 육망성(다윗의 별)의 색상과 크기등을 달리하여 SS대원들이 쉽게 간파하게끔 하였다.



 

1933년부터 19455월까지 12년간 수용소로 사용된 다하우수용소.

유태인 뿐 아니라 독일 공산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노동조합원,여호와의 증인,집시,동성애자, 폭력배등 위험인물,폴란드,터키,프랑스등 주변국 정치범등을 집단 수용하고 12년간 28만명을 수용하고 이곳에서 죽은 사람만 최하 28천명인 곳.

수용시설은 3층 나무침대와 공동 화장실과 공동 세면실 설치와 비교적 넓은 창문과 겨울에는 스팀시설까지 가동했던 독일의 수용소와는 달리 냉기로 가득한 서대문수용소가 떠 올라진다.

그래서 건축학자들은 전 세계 수용시설중 환기시설과 통풍,전기스팀시설,넓은 창문으로 햇빛을 맘껏 즐기게 한 다하우수용소는 수용시설중에는 세계 최고의 친환경 시설물이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반나절을 다하우 수용소를 돌면서 학생들이 가는 곳마다 진지하게 역사의 현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질문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잔혹한 역사의 현장을 지우기 바쁜 일본과 비교된다.

아직도 많은 우리의 여인들이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 갔지만 그 진실과 반성은커녕 단돈 100억원에 묻어 버린 일본의 정치행각과 역사인식은 소년상을 또 한번 울리게 한다.



무료로 관람하게 하고 역사의 현장에 독일의 어린 학생들에게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 독일.

일제시대가 아니라 독일점령 국가였다면 그리고 그들이 과거의 만행을 낱낱이 반성하고 후세들에게 철저한 자기성찰을 하는 기회를 주고 있다면 나는 기꺼이 독일을 용서하고 그 나라와 교류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일본이 소녀상의 눈물 하나 제대로 닦아주지 못하는 현실에서는 용서하기가 어렵다.

100억원을 돌려주고 시민운동으로 미래재단으로 거둬들인 돈으로 역사박물관이라도 하나 제대로 운영돼길 바란다.

아픈 역사도 미래를 알려주고 있고 역사를 바로 알아야 미래를 바르게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시인,수필가/환경국제전략연구소장/길샘 김동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