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판제 전 환경청장의 회고록-연재 11
박판제 전 환경청장의 회고록-연재 11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11
담임의 이 말을 듣자 금방 얼굴에 모닥불을 담아 붓는 것처럼 뜨끔
했다. 그와 동시에 남들처럼 공부에만 매달리지 못하고 주근야학하
는 바람에 대학입학을 위한 기본 성적이 조금 모자라게 되었다는
후회가 목구멍으로 궁글러 올라왔다. 담임의 권유에 따라 고려대학
상과대학에 응시하기로 했다. 만약 무시험에서 낙방이 되면 본고사
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네 탓 내 탓을 가리기 전에 이미 엎질러진 물
을 낙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시험 전형의 응시를 해놓고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입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득문득
무시험전형의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오나 하고 기다려져서 불안과
초조감이 꼬리를 물고 엄습해왔다. 더욱이 낮에 사무소의 일을 볼
때에는 이 불안과 초조감이 더더욱 기승을 부려 좌불안석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강복降福인가! 마침내 고려대학의 합격통지서가 날
아왔다. 그것은 더함없는 감격이요 광영이었다. 별나라의 악사들이
피리를 불어주고, 바다도 흔희작약하며 내 이 광영을 함께 축복해
주는 듯이 느껴졌다.
혈혈단신으로 추풍령을 울면서 넘어 온 내 청운의 뜻이 오늘에야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한없이 기뻤다. 하늘의 태양
은 더욱 빛났고 북악의 찬바람도 오늘따라 계절의 여왕 5월의 훈풍
처럼 살갗에 매끄러웠다. 일구월심 뼈를 깎고 체중이 내리던 지난
날의 각고가 다 오늘을 위해 존재했다고 느껴졌다. 그 파란만장이
이 한 장의 합격통지서로 잔잔해졌다. 나를 삼킬 듯이 미쳐 날뛰던
태풍의 눈도 청맹과니가 되고 말았다. 이 길보가 전해지자 공군 인
쇄소는 물론 공군 정훈감실까지 축하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그
들은 시골뜨기 청년의 굳은 의지의 승리라며 극구찬양을 했다.
그러나 인간은 용렬한 동물이라서 가장 작은 농隴 나라를 얻으면 그
보다 큰 촉蜀 나라를 얻고 싶어한다더니, 엉뚱한 욕심이 생겼다. 이
왕이면 서울대학교 상대의 본고시에 한 번 응시하자는 욕심이 생겼
다. 내 학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만 없다는 한 자락의 오만이 비온
뒤의 독버섯처럼 내 의식 속에 솟아올랐다. 이 오기는 이내 무산되
었다. 서울대학교 상대의 본고사 일자와 고려대학교 상대의 구두시
문口頭試問 일자가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고대를 가느냐, 고대
를 포기하고 서울대를 가느냐 하고 그 기로에서 무던히 방황했다.
주위 어른들의 간곡한 권유와 나의 비장한 결심은 마침내 고대를
택하게 했던 것이다.
내가 대학의 상아탑으로 발을 들이민 1960년은 우리나라에도 새 역
사의 장이 열리던 해이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조병옥趙
炳玉 박사가 서거했으며, 3월 15일 마산 부정선거 규탄 데모에 이어
419의거가 일어났으며,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물
러나고 그해 8월 23일엔 제2공화국의 장면張勉 내각이 민주와 자유
의 기치를 들고 새 출범을 했던 해다. 이렇듯 희망찬 새 나라의 정치
출발과 발맞추어 나의 대학생활도 큰 포부와 희망의 길 군악軍樂이
시작되었다. 내가 입학등록금을 낼 때였다. 이때에도 남들처럼 경
제적인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입학축의금이 각처로부터 답지
했기 때문이다. 공군본부와 정훈감실을 위시해서 인쇄소 연락사무
소에 드나들던 각 출판사 사람의 온정 어린 축의금이 답지하여 등
록금을 내고도 오히려 얼마만큼의 돈이 남았다. 세상에는 합격을
해놓고도 등록금이 없어서 아등바등하는 안타까운 사람이 더러 있
었다. 그런 사람과는 달리 적어도 그 당시만은 백만장자가 부럽지
않았다. 천리 객지에서 사고무친인 내가 이 어려운 숙제를 아무 걸
림돌 없이 거뜬하게 해결해냈다는 긍지가 도저히 나를 앉아 있게
하지 않았다.
● 제1부 뼈를 깎는 배움의 뒤안길-중에서
펴낸곳-나녹/511면/3만원/문의-02-395-1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