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문화생태산책-과학원동우회 통영을 가다-이순신의 사령부 제승당과 당포해전 현장, 그리고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과 이영도, 윤이상, 전혁림

문화생태산책-과학원동우회 통영을 가다

 

환경과학원동우회 무박 2일의 통영 생태문화탐방

이순신의 사령부 제승당과 당포해전 현장을 가다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과 이영도, 윤이상, 전혁림

 

환경과학원 동우회(회장 이민효)는 지난 51617일 무박 2일로 경남 통영 한산도 생태문화탐방 길에 나섰다. 밤길을 달려 새벽녘에 통영의 바람과 물결, 역사와 문화적 향기와 눈맞춤을 했다.(1155분에 출발 새벽 420분 도착)

이번 생태문화탐방은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이민효 회장과 새집행부가 처음 실시하는 행사로 김명진 부회장(생태탐방)이 기획한 첫 작품이다.

과학원동우회는 2011년 창립한 ()환경연구발전회(초대 회장 이길철,2대 나진균, 3대 이민효,4대 유병호) 가 발전적 해체를 하고 과학원 동우회로 재창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초대회장 조강래, 2대 현 회장 이민효, 사무총장 이재운)

새벽에 도착한 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서호시장 원조시락국집(시래기국)에서 이른 아침식사를 했다.

통영에는 중앙시장과 서호시장이 있는데 서호는 지역주민이 주로 애용하는 시장으로 굴과 멍게의 산지이지만 멸치도 이름값을 하는 곳이다.

찬란하게 환영하는듯한 아침햇살을 가슴으로 받아가며 25분간의 물살을 가르며 한산도에 도착했다.

 

한산도 제승당((制勝堂, 사적113호 한산도이충무공유적지)을 견학하고자 하였으나 방문등록은 9시부터라 제승당 바닷길(한산일주로)을 산책하며 머릿속에 어리는 난중일기를 물결속에 띄워 보았다.(사진/제승당 가는길)

선조 30(1597)에 폐진되었던 제승당은 142년 후인 영조 15(1739)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웠으며 1963년 정부가 사적으로 지정했다.  1975년 정부는 경역을 확장하고 보수하여 오늘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이곳에는 제승당을 비롯하여 공의 영정을 모신 영당과 유허비, 그리고 많은 송덕비, 사정, 수루 등 부속시설이 있다.

제승당은 이순신(李舜臣)의 사령부로 당포해전(唐浦海戰)을 승리한 뒤, 왜적과 세 번째로 접전한 곳이다. 적을 섬멸시키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의 사기와 전의(戰意)에 큰 타격을 준 곳이다. 그래서 행주대첩·진주대첩과 함께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는 이유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친 이후 늘 제승당에 기거하면서 휘하 참모들과 작전계획을 논의한 집무실이다. 원래 운주당(運籌堂) 터인데 운주당이란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기거하던 곳을 편의상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1740(영조 16)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옛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제승당이라 이름하였다. 운주라는 뜻은 지혜로 계책을 수립하자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대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5,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경내에는 영당인 충무사(忠武祠)를 비롯해 유허비·기념비·귀선각(龜船閣한산정(閑山亭대첩문(大捷門) 등이 있으며, 1976년 성역화작업으로 정비되었다.

역사적 문헌이 맞다면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가장 치욕적으로 여기는 이순신장군의 거처를 중수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면 비록 적군의 장수인 이순신을 일본인들도 존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추하게 된다.

제승당 첫 관문인 한산문이라는 편액은 충무공의 친필이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장군이 초대 통제사로 임명된 뒤 303년간(1593-1895) 208명의 통제사가 임명되었다.

 

일행은 한산도에서 나와 통영 미륵산 케이블카로 가기로하고 카페리호에 몸을 싣고 한산대첩의 전쟁터였던 한산만 물결을 가른다.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의 바다이다.

입구가 좁고 안쪽은 넓은 모양으로 남서쪽에는 두역포, 남동쪽에는 고포가 있다. 수심은 입구가 12-14m, 안쪽은 6-9m로 소형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다.

반면 한산만 남쪽의 통영만은 입구의 폭이 1.2km로 좀 더 넒고 수심은 10m 이상으로 대형선박의 출입이 가능한 지형이다.

임진왜란시 두역포에 삼도수군의 본영이 설치되어 전함인 판옥선과 정탐선인 척후선 100여척과 740여명의 조선수군이 주둔했다. 이같은 천연 지형을 이용한 이순신의 계략이 한산대첩의 대 승리를 거두게 된 곳이어서 유독 진지하게 한산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한산도가-

 

통영항 해안을 따라 한산대첩 광장과 연안에 전시되어 있는 판옥선 등을 보면서 통영 중앙시장의 활어시장도 둘러보는 여유로움을 가졌다.

일행은 택시를 나눠타고 미륵산으로 가려는 순간 임성순 회원이 배에 휴대폰을 두고 왔다는 외마디 비명이다. 일행들은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떠나고 임성순, 전성찬, 신찬기 3명은 통영여객터미널로 향했다. 되돌아가면서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임성순 회원은 어디 자연의 선물인 풍경을 제대로 보이기나 할까, 오히려 자신을 탓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요행 전성찬 회원의 재치있는 판단과 회원들의 협조로 통영여객선터미널 매표소에서 헤어진 애인을 만나듯 찾을 수 있었다.

미륵산은 미륵도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그 밑으로는 통영해저터널이 지나고 있다. 주변은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를 관통하는 길이 1,420m의 운하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인 1928년 착공하여 1932년에 완공한 한국 최초의 운하이다.

역사적으로는 한산도 대첩 당시 왜선들이 이곳으로 도망쳐 들어왔다가 퇴로가 막히자 모래를 파고 물길을 더 크게 내어 도망치려 했다고 하여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를 '판데목'(착량, 鑿梁)이라고 부르는데, 무수히 많은 일본군이 죽어 시체가 되었다는 뜻인 '송장목'이라고도 불렸다.

 

미륵산에서 내려와 통영활어시장에서 싱싱한 활어에 몇 잔의 반주가 오가는 점심을 마친 후 동파랑을 둘러보고 일부는 통영 건어물시장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통영은 문화예술인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재야 화가인 전혁림의 미술관이 있는 곳이며 통영국제음악제와 윤이상 음악제를 탄생시킨 작곡가 윤이상(동백림사건), 소설가 토지의 박경리, 김춘수 시인의 동상과 시비, 초정 김상옥의 생가, 유치환 시인과 사랑의 편지가 오가던 이영도의 생가(우체국 맞은편 서점)를 더듬어보는 맛도 통영이 선사하는 또 다른 진국이다.

통영의 청마 유치환 거리에는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된 이영도에게 연정의 편지를 5 천여 통이나 보냈던 이야기는 아름답고도 애잔함이 감돌게 한다.(사진아래 /미륵산에서 내려다 보는 통영앞바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희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청마 유치환의 행복중에서-

 

환경부 환경동우회 행사에서도 여성회원은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과학원동우회 생태탐방에 참석인원 13명중 여성회원이 2(김혜경, 백운란)씩이나 참석하다니 놀랍고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백운란 회원은 단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멸치 대가리추임새를 유도하여 사진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역시 사내 곁에는 여성이 있어야 맛과 멋, 풍광까지 아름답게 수 놓는가 보다.

 

(사진 좌로부터 백운란,장남익,김동호,이영렬,허성남,서정범,김명진,김혜경,이민효,이재운,전성찬,신찬기,임성순)

 

 

(환경경영신문 http://ionestop.kr 신찬기 전문기자)